“돈이 부족하다.”LG카드를 살리는 데서 발을 빼, 따가운 비난을 받은 외환은행의 로버트 팔론 행장은 지원을 거부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한 번에 두 개의 카드사(외환카드와 LG카드)를 살릴 만한 충분한 자금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간단명료한 해명이다.예견돼 있던 일이긴 하지만 외환은행의 지원 거부와 한미은행의 반쪽 지원 결정은 체면을 구겨가며 말 안 듣는 은행들을 ‘윽박지르고 구슬려’ 지원안을 만들어 냈던, 재경부 관계자들을 한 번 더 무안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LG카드 살리기는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다. 컨소시엄 참여 은행들은 매번 돈을 내놓아야 할 때마다 조건 등을 놓고 공박을 벌인다. 그때마다 지원이 중단된다는 불길한 뉴스가 새어나오고 있다.금융권도 관에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일까? LG카드 지원 여부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말과 올 초에,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이 선두에 섰던 민간은행의 반란을 해외에서는 큰 의미를 두고 해석했다. 국민은행 등이 선선히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한국 금융시장이 한 단계 성숙했다는 증거”라며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결과적으로 국민은행을 비롯한 신한ㆍ조흥 등 민간은행들은 정부의 LG카드를 살린다는 정부의 뜻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크게 반발하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LG그룹의 책임 한도를 더 확장케 하고 산업은행의 다짐을 받는 등의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민간은행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데는 역차별 논리가 강력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제일은행, 외환은행 등 국내에도 외국계 은행들이 늘어나면서 당국의 압력이 미치는 권역에 생긴 ‘구멍’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씨티은행의 한미은행 인수는 이런 현상에 한층 불을 댕길 전망이다. 이미 국내에서 3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씨티은행은, 그동안 나름대로 한국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해 왔다. 하이닉스 처리과정에 적극적으로 협력, 상당한 역할을 한 전례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 손익관계에 충실한 전략적이고 선택적인 판단이라는 측면이 크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기가 어려웠던 국내 금융사들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씨티가 한미은행과 합쳐져 5위권에 드는 메이저 은행으로 자리잡게 되면, 만약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거대 금융그룹 씨티와의 경쟁이라는 환경에 던져진 국내 금융사들 앞에서 기존과 같은 당국의 밀어붙이기식 정책은 더욱 명분을 잃게 된다. 은행 개방은 향후 금융계의 자율화에 한층 더 불을 댕길 것으로 전망된다.무엇보다도 변화의 조짐은 ‘만사의 출발점’인 인사에서부터 감지되고 있다. 재경부가 허를 찔렸던 주택금융공사 사장 선임과 세대교체로 평가받는 증권업협회장 인사가 이를 상징하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미 예정보다 오래 지연되고 있는 기업은행장 인사도 치열한 경합을 거치고 있다. 더구나 앞으로 3~4월에 우리은행 회장단을 비롯해 실질적인 정부 소유 은행들의 인사와 증권업 관련 단체장 등 굵직한 금융계 인사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현재 우리금융 회장 인사는 후보추천위원회가 구성돼 인터넷, 신문 등에 광고를 내고 “회장님을 찾는다”며 공개모집을 하고 있다. 결과는 기다려 봐야 하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자율경쟁의 틀을 갖춘 것이다. 기업은행장 인사의 결과는 향후 전개될 인사의 향방을 가늠케 할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분석된다.이미 외국계가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는 투신업계에서는 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국계 투신사 경영진은 지난해부터 모임을 만들어 감독당국자를 만나 정책이나 감독방법 등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기도 한다.물론 아직도 섣불리 완전한 자율화를 말하기에는 적당치 않다. ‘공모’라는 형식을 통해서 ‘자율화’의 내용을 추구하고 있는, 자율화의 핵심인 인사만 해도 완전한 독립이라기보다는 청와대와 재경부간의 기싸움 와중에 반사 효과를 누리는 경향이 많다. 재경부 낙하산 인사를 막아 그 병폐를 치유하고자 하는 청와대의 의지가 주체만 바뀐, 또 다른 형태의 관치로 치닫게 된다면 신선하다는 공모 제도도 실제로는 제자리걸음일 뿐이다.그러나 금융권 관계자들은 IMF 위기 이후 극심하게 변화된 환경이 이 같은 퇴보를 쉽게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한편 관치의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국내 금융사들이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국내 금융산업 자체가 정부와 한몸처럼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지금은 대내외적으로 시장에 가장 친화적이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있는 국민은행은 ‘국민은행법’에 따라 설립된 ‘국민은행’과 ‘한국주택금고법’에 따라 설립된 ‘한국주택금고’에서 출발한 국책은행인 주택은행이 합쳐져 오늘에 이른 은행이다. 이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금융사들은 나라가 얻어 온 빚인 차관을 기업들에 배분하는 것으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관치의 따뜻한 온실 안에서 곱게 성장했던 것이다. IMF 외환 위기 이후 이런 보호막이 사라지고 금융권은 극심한 경쟁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으므로, 보호막과 함께 간섭도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세련된 관치가 필요’LG카드 부실 지원을 둘러싸고 공방이 한창이던 와중에 자주 비교되던 이야기가 있다. 미 연방준비위원회(FRB)의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ong Term Capital ManagementㆍLTCM)처리 사례였다.1998년 9월23일 수요일 오후,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윌리엄 맥도너가 뱅커스 트러스트, 베어스턴스, 체이스맨해튼, 골드만삭스, JP모건,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딘위터, 살로먼스미스바니 및 유럽 주요 은행의 CEO들과 NYSE(뉴욕증권거래소)장을 불러모았다. 1998년 8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시장 전체가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맥도너 총재는 월가 은행이 구제금융을 줄 것을 요구했다. 월가 CEO단은 마땅찮았지만 회사당 2억~3억달러를 갹출해 36억달러를 만들었으며 시장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났다.FRB 주도로 위기를 막았던 당시의 신속 정확한 판단과 조처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된다. 잊혀지는 듯했던 이 일은 최근 LG카드 사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부각됐다. 불필요한 통제나 간섭은 하지 않으나 시장이 불완전한 모습을 보일 때는 재빨리 나서서 이를 봉합하는 이상적인 시장과 당국간의 관계로 비쳐졌던 것이다.한 시중은행의 임원은 관치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꺼리면서 이런 말을 던졌다. “앨런 그린스펀이 어떻게 말 한 마디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그린스펀이 시중은행에 낙하산 사장을 내려 보내서도, 말을 듣지 않으면 자리가 불안할 거라고 윽박질러서도 아니다. FRB의 방향을 거슬렀다가는 손해를 본다는 것을 시장참가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돋보기 | 씨티의 한미은행 인수 파장 - 무한경쟁시대 개막감독당국도 ‘업그레이드’ 압박“그들이 온다.”한미은행 인수를 통한 씨티은행의 국내 금융시장 본격 진출은 한국의 금융사 한 페이지에 남을 만한 대형 사건이다. 세계적인 금융그룹은 역시 손도 컸다. 3조원을 한꺼번에 턱 내놓겠다고 했다. “한국의 씨티를 미국 다음으로 큰 은행으로 키울 것”이라는 화려한 청사진도 내놓았다.현재 ‘씨티 이후’에 대해서는 무리한 추측과 설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씨티의 진출이 금융사와 감독당국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만은 이견이 없다. 지난 2월23일 씨티는 언론에 공식적으로 한미은행 인수를 밝히면서 “한국에 진출한 이래 한국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앞으로도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펼쳐지는 정책에 적극 협조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노련한 씨티는 이날 “한국을 아시아ㆍ태평양지역의 금융허브로 육성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이것은 빈말은 아니다. 세계 각국 진출 경험이 풍부한 씨티은행은 현지 정부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씨티은행 한국지점에도 정부와의 관계를 전담하는 직책과 인력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 은행은 그동안 내놓고 당국과 대립한 적이 거의 없다. 제도에 대해 개선을 요청하기는 해도 일단 정해져 있는 것은 칼같이 지킨다. 씨티은행 한국지점에 10여년간 몸담았던 한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약점이 없으니 팔을 비틀 여지도 없으며, 그러니 경쟁자에게나 감독당국에나 노련미 넘치는 무서운 상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