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재경부 낙하산 인사에 ‘선제공격’

금융권 인사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일단 사람을 결정하는 형식이 많이 바뀌었다. 공모 방식으로 대변되는 이 형식이 내용적으로 얼마나 변화를 몰고 올지는 더 두고 볼 일이나 당사자인 은행권은 환영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반면, 진두지휘하던 재경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참여정부 1년 만에 가시화된 이 같은 금융권의 인사 분위기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도 상존한다.2월10일 오후. 재정경제부는 주택금융공사 사장 내정자를 발표했다.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공모절차를 진행한 재경부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행시 수석으로 재경부가 내놓고 밀었던 김우석 신용회복지원회 위원장이 옛 주택은행 부행장 출신의 정홍식씨에게 밀린 것. 이는 앞으로 불어닥칠 태풍의 강도를 가늠케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주택금융공사 사장 공모에서의 이변 가능성은 2월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감지됐다. 재경부는 당초 1월 말까지 공모절차를 끝내고 청와대의 스크린을 거쳐 인사를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열흘 가까이 지연됐다.이 과정에서 재경부는 “왜 발표가 늦어지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역을 치러야 했고, “찍어 둔 사람 있으면 빨리 얘기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실무자들의 청와대를 향한 불만도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재경부 주도의 공모 결과를 바탕으로 복수로 인물이 추려진 서류가 청와대로 넘어간 뒤 답이 오는 시간이 늘어지자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불만인 셈이다.과거 관행으로 보면, 장관의 추천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의 경우 해당 부처는 복수로 사람을 추천하고 청와대측이 한 사람을 낙점한 뒤 이를 다시 해당 부처가 공식 추천하는 모양을 갖춰왔다. 당연히 해당 부처는 형식적으로는 복수의 사람을 추천하지만, 분명히 지원하는 인물이 있고, 이 경우 소위 ‘누가 보더라도…’라는 개념으로 재경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왔다.이번 주택금융공사 사장 추천과정도 다르지 않았다. 일단 형식적으로 공모 방식을 채택해 ‘투명한 절차’의 모습을 갖췄으나, 내심 재경부 관료들은 ‘그게 무슨 큰 차이가 있느냐’는 반응을 직간접적으로 비쳐왔다. 사실 그래야만 그동안 수없이 논란을 일으킨 ‘낙하산 인사’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고,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큰 변화에 내몰리지 않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료들의 희망이 관철되는 모양이었다.재경부 자신했던 주택금융공사 인사에서 허 찔려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청와대의 역공이 들어왔다. 방심이 화를 부른 것일까. 허를 찌른 청와대의 공세는 공무원 사회에, 최소한 재경부에는 일파만파의 충격을 줬다. 한 관계자는 “고시 수석자가 국책은행 임원에게 졌다”는 말로, 이번 사태를 전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청와대측의 의지가 확인된 만큼 어디까지 밀릴 것인지가 재경부 관료들의 현실적인 고민으로 다가왔다.일각에서는 이번 주택금융공사 사장 선임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정홍식 주택금융공사 사장이 영남출신이라는 점을 엮어 해석하는 관점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손’의 핵심이었던 재경부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무릎을 꿇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재경부 관료들의 심적 부담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로 충분할 듯하다.올해 들어 재경부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은 인사의 또 한 사례는 한국증권업협회장이다. 오호수 전 회장을 밀어내고 황건호 전 메리츠증권 사장이 회장으로 선출된 사건이다. 형식이 회원 증권사들의 투표로 이뤄진다는 차이는 있으나, 이헌재씨가 신임 부총리로 사실상 내정된 상태에서 이헌재사단의 핵심으로 꼽히는 그가 고배를 든 것은 ‘반란’으로 평가된다. 무슨 배짱으로 증권업계가 사고를 쳤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변화의 도입부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그렇다면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참여정부가 ‘인사 투명성’을 강조해 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 참여정부가 내건 인사 투명성의 핵심은 ‘절차의 투명성’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재경부 관료들이 ‘낙하산 인사에 대한 견제’라는 인식을 하면서도 자신감을 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여론이야 어떻든 ‘객관적으로 낫다’는 자신감이 관료들에게는 항상 충만하다.그런데도 이 ‘객관적으로 낫다’가 뒤집혔다. 이처럼 상황이 바뀐 상황을 정리해 보면 김종창 전 기업은행장의 금통위원 내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게 관가의 정설이다. 청와대가 ‘인사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재경부 관료들의 낙하산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무원의 인사교류 프로젝트도 궁극적으로는 ‘모피아’(옛 재무부 라인)로 불리는 재경부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여러 채널로 들려오는 소리를 종합하면 청와대로서는 이에 대한 손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차에 김종창씨의 금통위원 추천과정을 보면서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지난 2월12일 재경부의 금융권 인사독점을 지적하는 여론에 대해 “특정 집단이 특정 인사를 독점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문제”라며 “내부 지침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예산처 장관에 오른 김병일 전 금통위원 후임으로 전직 재경부 관료인 김종창씨가 추천된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비교적 직선적으로 드러낸 발언이다.이를 분기점으로 청와대의 액션은 더욱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증권업협회가 반란을 일으킨데다 주택금융공사에서 허를 찔린 재경부는 또다시 일주일여 만에 뒤통수를 맞았다. 정찬용 인사수석이 직접 우리금융지주회사 경영진을 만나 인사문제 등을 협의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안개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정수석은 2월17일 우리금융 윤병철 회장과 전광우ㆍ민유성 부회장, 이덕훈 우리은행장 등 경영진 6명을 초청해 우리금융그룹 현안에 관한 의견을 들은 뒤 곧바로 회장 공모작업에 들어가는 발빠른 모습을 보였다.사실 공기업 인사에서 이 같은 청와대의 사전 스크린이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있어 왔다. 그러나 격이 달라졌다. 청와대 인사수석이 직접 나서면서 다소 공개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황이 연출됐으며, 이는 그동안 영유권을 보유한 재경부에게는 ‘밥그릇 낚아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 됐다.정수석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수석은 앞으로도 각종 공기업 인사의 사전 스크린 작업을 직접 챙기겠다는 의욕을 보였고, 최근 발매된 월간지 <포브스코리아> 3월호와의 인터뷰에서는 ‘관(官)이 정하고 민(民)은 따른다’는 공무원 사회의 타성을 지적했다. 나아가 “한두 번은 몰라도 서너 번씩 자리를 독점하는 것은 문제로 산하단체장이나 협회장, 금융기관장 등을 싹쓸이 하다시피 하는 재경부 출신 관료의 낙하산식 인사를 규제할 계획”이라고 재차 포문을 열었다.재경부 관료들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특히 ‘한두 번도 아니고 서너 번’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이번 청와대의 인사 직접 챙기기의 직접적인 발단이 재경부 공무원에서 물러나 금융감독원 부원장, 기업은행장을 거쳐 금통위원까지 세 번 말을 갈아탄 김종창씨의 금통위원 추천에서 시작됐다는 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끔 하면서 재경부와 청와대의 ‘힘겨루기’ 가능성도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는 분위기다.힘 실린 이헌재 부총리…자기 꼬리 자르며 해법 찾기 골몰‘힘’의 중심에는 이헌재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이 자리잡고 있다. 청와대측의 삼고초려를 통해 힘을 받을 때까지 받은 이 부총리의 재경부 재입성은 관료들에게는 그야말로 ‘희망’인 것이다. 이부총리가 현 참여정부와 색깔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 소위 코드가 맞지 않음에도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예를 갖추는 성의를 보였다. 그래서 이부총리 임명 후 곧바로 상당한 재량권을 얻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무성했다. 재량권이란 다름 아닌 인사권이다.이부총리가 실제로 인사 재량권을 확보했는지는 아직 알 길이 없으나 LG카드 사장을 취임하자마자 ‘전화 한 통화’로 정리, 재경부 공무원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린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박해춘 서울보증보험 전 사장의 LG카드 사장 선임과정을 보면, 이부총리의 결단력과 함께 강한 카리스마에 의한 보스 기질을 엿볼 수 있는 한편의 드라마 같다는 해석이 줄을 잇는다. 당연히 재경부 관료들은 한편에서는 이부총리의 카리스마에 긴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속시원한 심정임을 부인하지도 않는다.하지만 이부총리가 문제를 푸는 해법은 조금 다르게 나타났다. 조금은 단호하게 재경부 1급 고위직을 먼저 치면서 내공을 축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하다. 재경부의 김규복 기획관리실장이 이부총리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며 현재로서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이어 김영룡 세제실장도 뒤를 이었다. 물론 재경부 1급들은 서운한 감을 언뜻언뜻 내비치면서도 ‘밖에서 쉬면서 때를 기다려라’는 이 부총리의 메시지를 일단 따르고 있다. ‘민간인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은 이 부총리의 ‘결단’은 청와대측과도 사전조율이 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이부총리가 1급 교통정리 의사를 청와대측에 전달하고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후일을 기약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부총리로서도 청와대측에 할 만큼은 하고 요구한다는 모양을 갖춰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청와대와 재경부의 긴장도를 높이는 데는 분명히 한몫 하고 있다는 관측이다.단기적으로도 얼마 남지 않은 기업은행장과 우리금융지주회사의 경영진(전북ㆍ경남ㆍ광주은행장 포함) 인사가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 청와대와 재경부간의 ‘힘겨루기’ 해석도 1차 평가를 받을 게 분명하다. 특히 기업은행장과 우리금융지주 경영진 인선은 이부총리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실증할 수 있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청와대의 재경부 낙하산 인사에 대한 개혁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세 싸움이 불가피한 형국으로 흐르고 있다.이어 4월에는 금융결제원장과 국제금융센터소장, 한국은행 부총재보 2명과 금융통화위원 3명, 증권예탁원 사장 등의 임기가 끝날 예정이어서 재경부로서도 3월 전투에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역으로 재경부의 이 같은 인식은 그것이 옳든지 그르든지 청와대의 새 인사시스템이 평가받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