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정경쟁 자제 ‘역발상 전략’으로 증권업계 새바람 … 중국금융시장 진출, 의욕적 추진

‘삼성증권’ 하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의 대표증권사다.이런 회사의 CEO를 맡는다는 건 보통 이상의 부담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또 웬만한 경영방식으로는 주주나 시장에 임팩트를 주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삼성투신운용 사장에서 올 6월 삼성증권 대표로 자리를 옮긴 황영기 사장은 시장과의 첫 만남부터 ‘역발상 전략’으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황사장의 취임일성은 ‘약정경쟁 지양, 정도경영’이었다. 황사장은 1위 자리를 내주더라도 원칙을 지켜 경영하겠다는 방침을 취임후부터 누누이 강조해왔다. 황사장은 또 앞으로 고객 수익률을 영업직원의 평가잣대로 삼겠다는 원칙도 분명히 밝혔다. 증권사가 약정경쟁을 하지 않겠다니, 지점영업을 포기한다는 뜻일까? 한편으로는 다른 증권사들의 경영관행이 잘못돼 있다는 우회적인 지적이기도 해 기자는 황사장의 진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황사장의 설명은 이렇다. “증권사가 무리하게 수수료 수입에 집착해 고객의 돈을 함부로 다루는 관행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겠다. 삼성이 한다면 증권업계 전체의 관행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이어 “증권업계는 그동안 고객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후진적인 영업행태만 계속해왔다. 국내 증권영업은 은행이나 보험에 비해 개인고객에 대한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자산획득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세계에 국내금융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우리끼리 엉뚱한 경쟁을 하다간 공멸할 수 있다는 ‘원려(遠慮)’도 깔려 있다.“위탁매매 중심 영업관행에서 벗어나야”삼성증권이 쌓아 놓은 브랜드파워가 뿜어내는 자신감에서 나온 황사장의 이같은 전략이 열매 맺는다면 삼성증권은 확고한 1위 자리를 굳힐 수 있을 것이다. 즉 삼성증권에 돈을 맡기는 고객들은 적어도 ‘영업직원이 자의적으로 매매해서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고 이는 다시 시중자금이 삼성증권으로 밀려 들어오는 선순환구조를 만들 수 있을 터. 어떻게 보면 황사장은 지금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바둑을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약정경쟁을 하지 않고 과연 증권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황사장도 이런 회사 안팎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 황사장의 대답이다. “주식매매 약정이 증권사 수입의 80∼90%를 차지하는 상태에서는 약정경쟁이 불가피하겠지만 앞으로 삼성증권은 투자은행, 자산관리 부문에서 생존전략을 찾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회사의 수익구조를 5:3:1에서 3:3:3으로 바꿔 놓겠다고 말했다. 위탁매매(현재 50∼55%) 자산관리(30∼35%) 기업금융 및 자산운용(10∼15%)의 수익구조를 각각 30%로 바꿔 투자은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겠다는 설명이다.사실 삼성증권은 일찍부터 투자은행 전환을 준비해 왔다. 코스닥시장의 설립 산파 역할을 맡은 류시왕 전 코스닥증권시장 전무를 최근 상임고문으로 영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금융업은 결국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자산을 누가 더 많이 보유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는 점에서 이같은 황사장의 경영방침이 다른 증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황사장은 그러나 정도영업을 강조하면서도 이익을 내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정도영업이 목적이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기업의 목적은 영업을 해서 이익을 내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지적했다. 회사의 우선순위가 약정경쟁이 아니라는 것이지, 수익을 위한 방편은 다각도로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정도경영’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업계에 각인시킨 황사장은 이제 영업무대를 중국까지 넓히려 하고 있다. 중국의 유력증권사와 합작증권사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 그래서 취임후 처음으로 잡은 해외출장지도 중국으로 정했다. 중국에 진출하는 국내기업의 M&A, 현지투자나 합작 또는 기업금융 등에 대한 자문업무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포부다.중국진출은 최근 국내외 경제계의 지배적인 분위기 탓이기도 하지만 황사장이 일찍부터 국제금융계를 경험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사장은 삼성그룹에 입사한 뒤 5년차 대리시절인 80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 MBA를 땄다. 그 후 파리바은행 서울지점장, 뱅커스트러스트 아시아담당 부회장 등 잠깐 외도를 하다 89년 삼성그룹 비서실 국제금융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삼성그룹이 그룹을 떠났던 사람을 대체로 재기용하지 않는 전통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국내 금융기관 CEO 중에서도 국제감각이 뛰어난 CEO에 속한다. 그래서 황사장은 직원들에게도 국제감각을 갖춘 금융인이 될 것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재무분석가 자격증인 CFA 시험에 회사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책을 발표했다. 현재 2백50여명의 삼성증권 직원이 이 시험에 도전 중이다.황사장은 2002년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크다. 정도영업의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날 것인 데다 내년은 지난 82년 한일투자금융으로 출발한 삼성증권이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다. 국제증권으로 이름을 바꾼 뒤 삼성이 인수한 건 92년 11월이지만 회사 생일은 1982년 10월19일로 잡고 있다.황사장은 “내년은 성년에 걸맞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한편 21세기 증권업을 선도하는 종합투자은행으로 발전하기 위해 리딩컴퍼니로 도약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