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갤러리아 명품관, 언니는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어머니는 새로 생긴 롯데 에비뉴엘을 선호해요.”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김혜정씨(28)의 가족은 각기 다른 백화점을 다닌다. 백화점의 숨막히는 명품전쟁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취향대로 백화점을 고르게 됐다.그렇다면 김씨의 가족은 부유층일까. 김씨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의 가족을 ‘중산층’으로 표현한 김씨는 “백화점 명품관에 갈 때도 있지만 할인점도 자주 들른다”고 설명했다.박진 우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국의 할인점은 외국과는 달리 고급화돼 백화점과 할인점의 고객층 가운데 겹치는 부분이 있다”며 “이런 이유로 최근 백화점들은 급성장하는 할인점과 차별화를 위해 명품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박애널리스트는 이어 “다른 물건은 안 사고 돈을 아껴서라도 꼭 갖고 싶은 명품은 사겠다는 소비자가 늘면서 명품소비의 대중화가 촉발됐다”며 “또 최근 2~3년 사이 불경기 상황에서도 고소득층은 소비경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덧붙이며 백화점의 명품경쟁 원인을 설명했다.백화점들이 명품에 쏟는 막대한 돈과 노력은 한눈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건물과 인테리어 등 하드웨어적 부분에 심혈을 기울이는 백화점이 적지 않다.롯데백화점은 지난 3월 서울 명동 본점 바로 옆에 화려한 위용의 명품관 에비뉴엘을 열었다. 신세계도 오는 8월 명동 본점 신관을 오픈하고, 본점의 명품매장은 별도로 리뉴얼해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들 백화점은 본점이 명동상권에 붙어 있어 오래전부터 라이벌 백화점으로 비교돼 왔다. 명품관까지도 몇 달 간격을 두고 문을 열게 돼 숙명의 경쟁을 또 한번 펼치게 됐다. 두 백화점 모두 명동상권을 필두로 강북고객을 끌어들인 뒤 강남고객에게까지 발을 넓히겠다는 전략이다.롯데와 신세계의 총성 없는 명품전쟁에 갤러리아와 현대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남권의 이들 백화점은 겉으로는 크게 동요되지 않는 모습이다.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의 경우 1990년에 개점, 1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오랜 역사와 함께 노하우를 차곡차곡 쌓아온 갤러리아 명품관은 롯데와 신세계에 질세라 지난해 9월 대대적인 리뉴얼을 단행했다. 기존의 패션관을 제2의 명품관 웨스트로 재개관해 이스트와 웨스트라는 명품관 양대산맥을 일궈 놓았다. 이스트와 웨스트를 합산한 영업면적만도 ‘명품 강자’답게 총 7,768평이다.현대백화점 또한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과 무역센터점 고객이 강북까지 가서 명품을 사겠느냐는 입장이다. 지난해 명품매출 2,700억원을 올린 현대백화점은 시설과 인테리어에 투자하기보다 새로운 서비스로 고객을 만족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지난해 8월부터 ‘라이프스타일리스트’(Lifestylist)라는 슬로건을 새로 내세우며 고객에게 생활문화를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다지 느긋해 보이지는 않는다. 롯데와 신세계의 공격적 영업이 강남상권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서비스를 잇달아 선보이고 다른 업체들의 동향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백화점 명품브랜드의 고객인 VIP를 위한 마케팅 전략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대리주차를 해주는 발레파킹과 음식과 다과를 제공하는 케이터링은 이제 식상한 서비스에 속할 정도다. 신세계와 현대는 호텔에만 있던 컨시어지(Concierge)서비스를 백화점으로도 불러와 고객의 쇼핑 비서가 돼준다. VIP라운지도 열어 신세계의 ‘멤버십 라운지’ ‘퍼스트 라운지’, 현대의 ‘자스민룸’ 등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이름을 붙었다. 갤러리아는 아예 ‘퍼스널 쇼퍼룸’이라는 별도의 VIP를 위한 매장을 만들었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퍼스널 쇼퍼룸’에 온 초특급 VIP는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백화점 직원이 매장에서 상품을 가져오면 그 자리에서 입어볼 수 있다.백화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고객서비스 차원에서 고품격 명품잡지를 내고 있기도 하다. 롯데는 지난 에비뉴엘 기념을 앞두고 지난 1월 명품관 이름과 같은 <에비뉴엘>이라는 명품지를 냈고, 갤러리아는 <더 갤러리아>를 발간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스타일 H>를, 신세계는 <퍼스트레이디>라는 명품지를 VIP고객에게 발송한다.백화점들의 명품마케팅 뒤에는 오너의 손길이 직접 닿아 있어 더욱 화제다. 롯데백화점의 명품은 신격호 롯데 회장의 딸인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 신영자 부사장의 딸인 장선윤 해외명품담당 이사가 이끈다. 신세계는 롯데 신부사장과 비슷한 연배에 이화여대 동문이기도 한 이명희 회장이 진두지휘한다. 또 현대백화점의 경우 정몽근 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부회장과 차남 정교선 이사가 명품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후문이다.하지만 백화점들의 투자만큼 명품이 ‘황금송아지’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전문가들 대다수는 대한민국 1%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고객을 단골로 만들 업계 1~2위만이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점입가경의 백화점 명품쟁탈전 속에서 승리의 월계관은 누가 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