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 오후 2시께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증권사 지점. 주식시장 폐장까지는 1시간 남짓 남아 있지만 객장 안은 고요하다. 데스크에 앉은 직원들은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고, 간간이 전화 통화 소리만 들려올 따름이다. 이곳에 머무른 30여분 동안 이 지점에 방문한 고객은 세 명뿐. 지점 직원은 “우리 지점의 주식 거래 고객들은 대부분 전화나 온라인으로 상담을 한다. 방문은 드문 편이다. 영업직원들은 모두 바쁘지만 그렇다고 객장이 붐비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다음날 같은 시간, 명동의 증권빌딩에 위치한 모 증권사 지점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의자에 앉아 시세 변동을 관찰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투자자들이 많아서 ‘전통적인’ 증권사 객장의 분위기가 났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들락날락해 분주한 모습이다. 이 지점 상담직원은 “명동은 개미투자자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고, 온라인거래에 어려움을 느끼는 중장년 투자자들이 많이 찾기 때문에 특수성이 있다” 면서 “명동 등 몇 군데 지점만 이런 특성에 맞춰 운영될 뿐, 증권사 전체로 보면 우리 지점과 비슷한 곳은 드물다”고 말했다.증권사의 오프라인 점포들이 존폐의 갈림길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주식시장이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가운데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려 온 증권업황의 한파를, 영업의 최전선인 지점이 앞서 맞고 있는 것이다. 요즘 만날 수 있는 증권맨들은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는데, 특히 임원 등 경영진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고객을 만나는 지점 영업맨들이 더하다. 당장 소득이 줄어들고, 영업성과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지점 채산성 맞추기가 점점 어려워 한계상황에 봉착했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스스로 증권사에 찾아오는 고객은 거의 없다. 영업을 3년 이상 한 사람이면 친척이나 친구 등 주변에 아는 사람은 다 소진됐을 것이고 따라서 나가서 신규영업을 해야 하는데 주식투자에 대한 인식이 워낙 좋지 않아서 그마저 어렵다. 오죽하면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중에 ‘보증 서지 말고, 주식 하지 말자. 그러면 밥은 먹고 산다’는 게 있겠는가.” 주식영업 경력 6년차인 한 대리의 말이다. 그는 “주식으로 손해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주식시장을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세대가 바뀌면 모를까, 그전에는 개인들이 다시 주식시장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은행화 전략 등 대응책 마련 분주…확실한 솔루션은 ‘미완성’이처럼 지점 상황이 나빠진 것은 증권업 환경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종합주가지수가 상승하면 증권사의 수수료 수익도 거의 같은 곡선을 그리면서 따라 올랐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시장 규모는 커진 반면, 증권사의 평균 수수료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98년과 지난 연말을 비교해 보면 수수료율은 약 65%나 떨어졌다. 그런데 98년보다 지점수는 더 많고, 증권사수도 늘어났다. 은행 등 다른 금융사는 구조조정을 거쳤지만 증권업 구조조정은 계속 지연된데다 투신에서 전환한 증권사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과당경쟁과 구조조정 지연, 은행 등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까지 겹치니 지점의 채산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지난 3분기(2003년 4~12월)까지 국내 증권사들은 7조9,965억원의 영업수익을 기록했다. 이중 국내 증권사의 주요 수익원인 수수료 수익은 3조3,650억원에 그쳤다. 이는 전체 영업수익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치.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00억원 가량 줄어들었다.더구나 위탁영업(브로커리지) 수수료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익원으로 부상하는 듯했던 수익증권 판매수수료도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3분기의 수익증권 취급수수료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약 40% 줄어 5,400억원에 그쳤다. 이는 SK글로벌, 카드 사태 등 일련의 대형 이슈들로 인해 수익증권 판매고가 급감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더구나 은행 등 증권업 외의 경쟁자가 생긴 것도 수익증권 영업을 어렵게 했다. 조만간 보험사도 수익증권을 판매하게 되면 이런 상황은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이 같은 상황에서 일부 증권사들은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점포 줄이기에 착수, 연말까지 지점수를 꾸준히 줄였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7개 지점의 문을 닫고 2개는 규모를 줄여 영업소로 전환했다. 세종증권은 전체 46개 중 14개를 없앴고, 메리츠증권은 5개, KGI도 6개를 축소했다. 대우증권은 8개를 폐쇄한 반면, 신설 지점은 1개뿐이었다. 지점수가 늘었거나 변동이 없는 곳은 업계 수위인 삼성증권과 LG투자증권, 규모가 작은 미래에셋증권 정도다. 우리증권은 현재 점포 재정비를 진행 중으로, 35개의 지점 중 4개를 폐쇄하고 7~10개의 은행에 인력을 재배치할 계획이다.통계를 보면 과거 국내 증권사의 지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 활황세였던 2000년에 정점을 찍고 있다. 이때 국내 증권사의 지점수는 1,800개에 달했다. 많은 중소형 증권사들이 공격적으로 지점수 확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를 고비로 점포수 증가세는 반전돼 2002년 6월 1,729개, 2003년 6월 1,668개 등 점차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문제는 지난해 증권사들이 일제히 점포 구조조정에 나서 이를 일단락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지점의 채산성 위기가 마땅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증권업 관계자들은 “증권가 인력감축 바람이 지나간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지점 정리가 조만간 다시 한 번 몰아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 증권사 임원은 “일부 증권사가 종합자산관리 등으로 전략을 수정했으나 이는 금세 수익이 나는 모델이 아니다. 수익이 날 때까지 버틸 여력이 있는 한두 개 회사와 금융지주사에 속한 증권사를 제외하면 또다시 정리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역시 90년대 초반에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증권사 지점수는 경제활동인구 등을 감안해 견줄 때 일본 증권사 지점수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보다도 더 많다는 설명이다.소속 증권사나 점포가 들어선 위치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업계에서 일명 ‘풀 브랜치’(Full Branch)라고 부르는 평균적인 지점의 경우 15~20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계좌나 출금 등을 담당하는 업무직원이 5명 내외, 영업직원 10여명 내외, 그리고 지점에 따라 자유직 투자상담사들이 2명 내외로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지점 운용비용을 일괄적으로 산출하기는 어렵다. 굿모닝신한증권 리테일영업기획부 윤병민 과장은 “점포 임대비, 인건비 등을 주요 지출로 볼 수 있으나 본사의 시스템 등이 실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독립채산 개념으로 한 지점의 비용과 수익을 엄밀히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정확히 지점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지, 수익을 내는지는 해당 증권사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수지를 맞추지 못하는 점포는 이미 정리했고, 남아 있는 곳은 수익을 낸다’고 발표함에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다.증권사와 은행간의 제휴계좌 이용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증권사 지점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지난해 12월 증권사와 은행이 제휴해 발급한 계좌수는 모두 135만9,945개로 2002년 12월 82만6,982개보다 64%나 늘었다. 앞으로 제휴계좌를 통해서 수익증권이나 ELS 등 다른 금융상품까지 거래할 수 있게 되면 이 수치는 계속 높아질 전망이다.현재 증권업계는 다양한 해결책을 찾고 있다. 은행이 중심이 된 금융지주사 밑의 증권사들은 은행 안에 데스크를 1개 설치하고, 2명 가량의 직원만 배치하는 은행 내 영업소를 대안으로 삼고 있다. 우리증권은 현재 22개의 은행 내 영업소를 운영 중인데 연말까지 100여개로 늘릴 계획이며, 굿모닝신한 역시 지점영업의 비중을 은행 내 영업소에 둔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하나증권 역시 올해 10여개의 영업소를 열게 될 것으로 보인다.삼성이나 LG 등의 대형사의 지점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더구나 이런 회사들은 이미 수수료 수입에 의존하는 전통적 의미의 증권사가 아니라 은행과 다름없는 종합자산관리 금융사로 변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기 때문에 지점의 의미도 다르다. 금융상품을 중심으로 증권사가 체질변화에 성공한다면 오프라인 지점은 골칫덩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온라인뱅킹이 활성화된 지금도 은행 점포는 여전히 중요한 곳인 것처럼 말이다.그러나 직원의 영업력 저하, 취급 상품의 한계, 대형 고객이 몰리는 업무의 제한 등 은행 내 영업소 전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적잖다. 확실한 솔루션을 만들 때까지 업계의 대안 찾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증권사 자체의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거나 본사에서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하면 적자에 허덕이는 지점들은 사라지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돋보기 | 외국계 증권사, 탈중개영업?HSBC·ING 비수익부문 정리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축소하는 등 비용감축이나 구조조정의 압박은 국내 증권사들만 겪는 것은 아니다. 최근 HSBC증권 서울지점은 리서치부를 없애고 국내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한 증권중개영업(브로커리지)을 하지 않기로 했다. 기업금융과 외국인투자가들의 주식 주문을 받는 영업은 계속한다. 한국의 주요 기업에 대한 분석은 홍콩에 있는 아시아ㆍ태평양 본부에서 맡게 될 전망이다. HSBC증권은 국내 기관 대상의 증권 영업을 중단하는 것과 리서치를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인원도 10여명 축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와 함께 ING그룹이 2월10일 아시아 내 주식사업부 중 일부를 떼어 맥쿼리에 매각하기 위해 양측이 독점 실사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혀 눈길을 끈다. 외국계 증권사들의 국내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중개영업 포기가 러시를 이루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는 것. ING증권은 아시아에 증권영업과 관련해 10개의 지점을 갖고 있으며 서울지점은 그중의 하나다. 매각대상이 된 사업부문은 리서치, (주식)영업, 기업금융 인수 및 중개 업무 등이다. 반면 M&A나 파생상품 등은 매각하지 않고 그대로 영위할 계획이다. 쉴 콜리 ING 아태지역 홍보담당은 리서치와 영업부서를 매각하는 이유가 “수익이 나지 않아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사업부문에만 집중하기 위해 매각하기로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콜리는 “만약 딜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리서치 등 매각대상 부서 소속의 서울지점 직원들은 맥쿼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