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의 금융업 진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드세다. 외국자본에 대한 대항마를 키우자는 여론을 등에 업고 산업자본이 4% 이상 지분 참여를 못하도록 한 현행 은행업법 개정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감독당국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최근의 LG카드 사태는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했을 때 나타나는 폐해의 단적인 예라는 것. 그러나 산업계의 요구도 집요하다.전경련 관계자는 “국내 자본에 대해 역차별 규정을 만들어 놓고 외국자본만 우대한 결과 최근의 헐값 매각 등이 나왔다”며 “외국계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자세를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와 관련, 전경련은 최근 ‘외국인 투자동향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자금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역차별 규제로 외국자본과 동등하게 경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국내 금융사를 거의 독점 인수하고 있다”며 간접 공세를 시작했다.시중은행장들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 주재 금융협의회에서 은행장들은 “외국인투자가들이 전세계를 무대로 한 영업망과 높은 신용등급, 고도의 금융기법 등을 배경으로 국내 금융시장을 공략해 국내 우량 고객과 우량 금융상품을 잠식할 우려가 있다”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국내 자본을 사실상 역차별하고 있는 은행 지배 및 소유에 대한 현행 규제를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시중은행 관계자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간의 방화벽을 잘 설치하고 이의 감독을 철저히 하면 일부에서 우려하는 유착 및 부패 발생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며 “규제의 문제라기보다 감독의 문제”라는 입장을 나타냈다.한편 최근 은행권에서는 “재경부에서 은행업법 개정을 통해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키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재경부에서는 “아직 은행업법 개정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거나 논의한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재경부 관계자는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투명성 문제를 차치하고도 우리 재벌은 외국 대기업들에 비해 업무 범위가 너무 넓다”며 “현재의 문어발 시스템의 개선 없이 규제를 열어주는 것은 시기상조로 본다”는 의견을 반복했다.이와 관련, 정부는 1년간의 논의 끝에 최근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부작용 방지 로드맵’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초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를 핵심내용으로 담을 예정이었으나 최근 외국자본의 지나친 독식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 부작용 방지 최소화로 내용을 수정, 완화했다.핵심내용은 △대주주 여신한도 축소 등 산업ㆍ금융자본간의 방화벽 설치 △대주주 거래분에 대한 대손충당금 강화 △자산운용한도 설정 기준 자기자본으로 일원화 △부채비율 200% 초과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업 진출 원천 봉쇄 등이다.그러나 이헌재 펀드의 등장 등 그 어느 때보다 산업자본에 유리한 주변 환경을 고려, 재계의 금융업 진출에 대한 강한 의욕은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대한상공회의소는 이 로드맵에 즉각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분리정책의 문제점과 정책개선방향’이라는 건의서를 통해 GE, GM 등 다국적 초우량 기업들처럼 금융회사 겸영을 허용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응수했다.그러나 금감원은 은행업법까지 개정하면서 규제를 풀어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산업자본이 비금융쪽 사업부문을 단절시켜 놓기만 하면 현 제도로도 금융업 진출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금감원 관계자는 “아직 금융업 진출에 대한 개별기업들의 의사 표명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규제 철폐를 논의하는 것은 무리”라며 “의사 타진이 있더라도 비금융 부문을 단절시키기만 하면 10% 이상 지분 확보가 가능한 등 기업들의 욕구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이런 가운데 최근 삼성의 금융계열사 재편이 잇따르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최근 삼성카드는 삼성캐피탈과 합병을 완료했다. 이에 대해 지난해 12월 이학수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금융사 구조조정 차원”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애초에는 삼성생명이 합병 삼성카드에 1조원을 단독 출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총자산 가운데 3%만 계열사에 투자할 수 있는 보험업법 출자한도에 걸려 삼성전자와 5,000억원씩 공동출자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합병 삼성카드의 최대주주는 61%를 보유한 삼성전자다. 하지만 삼성전자 IR팀장 주우식 전무는 1월 기업설명회에서 “삼성카드 지분을 점진적으로 처분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전무의 발언은 삼성카드를 제3자에 매각하거나 삼성생명에 넘기는 계열사간 거래 양쪽 모두를 시사할 수 있다고 해석됐다.또 삼성생명은 우리은행 주식 3% 매입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현재 국내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주인을 찾아줘야 할 몫으로 남아 있는 대형 은행에 대한 지분투자였기 때문에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배경에 대해 역시 이학수 부회장은 “방카슈랑스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제휴”라고 설명했다.한편 삼성생명 계열사인 삼성선물과 삼성증권의 계열사인 삼성투신운용의 지분교환이 추진되고 있다. 이 지분 맞교환은 삼성증권 정주영 전무가 삼성선물 사장으로 내정되고, 삼성증권 황영기 사장이 “삼성투신과 삼성선물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삼성증권과 삼성생명이 바꿔 맡아서 수립하기로 했다”고 밝혀 가시화됐다.이렇게 삼성계열 금융사들 사이에 적잖은 변화가 계속되자 삼성생명을 축으로 하는 금융지주사가 설립돼 금융전업그룹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칠 줄 모르고 제기되고 있다.삼성은 가장 많은 금융계열사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집단이다. 삼성생명을 필두로 삼성증권, 삼성화재, 삼성투신운용, 삼성선물, 삼성벤처투자, 삼성카드, 삼성화재, 생보부동산신탁 등이 있다. 이밖에도 계열은 아니지만 삼성생명 등을 통해 여러 개의 금융사에 지분참여를 하고 있기도 하다.이 같은 삼성계열 금융사들은 다른 대기업 계열 금융사들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데 비해 대부분 해당 업종에서 1, 2위의 선두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최근 삼성카드의 위기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곤 크게 실패한 전례도 없다. 또 삼성은 오랫동안 은행을 가지려고 기회를 봐왔지만 항상 규제에 묶여 좌절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은행 임원은 “은행을 제외하고 금융그룹을 추진한다면 유일하게 가능한 곳이 삼성”이라면서 “세계적인 은행을 키운다는 정부와 삼성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금융그룹화 가능성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삼성 구조본측은 이런 주장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이와 관련,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선웅 대표는 “설령 금융그룹으로 가고자 한다고 해도 삼성의 지배구조가 삼성생명과 에버랜드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이건희 회장 일가의 지배력이 차단되는 금융지주사를 설립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별도의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한다 해도, 그 지주회사가 이건희 회장 일가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지분 정리를 할 수 있겠느냐에 의문이 간다는 것이다.LG, 현대, SK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금융업에서 고배를 든 상황에서 삼성을 제외하면 금융업 확대를 시도할 여력이 있는 대기업은 많지 않지만, 한화가 무리를 해서라도 끝내 대한생명을 인수한 것처럼 여전히 금융업을 고부가 성장산업으로 보는 기업이 많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감상조 소장은 재벌이 금융사 소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고전적인 이유로 금융계열사가 재벌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아니라도 긴급한 상황이 되면 지원에 나선다는 것이다. 둘째는 재벌 총수의 경영권 보호를 위한 안전판 노릇을 한다는 것. 김소장은 “삼성그룹은 아예 자금이 풍부한 금융사인 삼성생명을 그룹 지배의 핵심고리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이와 관련, 모건스탠리 신재하 전무는 “향후 한국의 투신, 생명보험, 증권사 등 제2금융권이 활발한 인수합병을 통해 구조조정과정을 겪을 것”이라면서 “98년부터 최근까지는 외국계 사모주식투자펀드가 많았으나 올해부터는 대기업 계열이 비핵심사업의 매각, 합병 등을 추구할 것이며 이를 사는 것은 여력을 갖춘 국내 원매자들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미은행, LG증권, LG카드, 현대증권, SK증권, 한투, 대투증권 등이 매물로 나와 있는 금융사들인데 외환위기 이후 그랬던 것처럼 외국계 자본이 사는 일은 빈번하지 않고 대신 국내 산업자본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예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