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이었다. 올해 초 삼성 인사에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생활가전총괄을 직접 맡았다.삼성 안팎에서는 ‘의외’라는 시각이 대다수였다. 인사 발표 직전까지 한용외 전 사장(현 삼성문화재단 사장)이 유임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부회장은 연간 매출 43조원(국내)의 기업을 이끄는 사령탑이다. 가전은 삼성전자 전체 매출액의 7.8%에 불과한 조직이다. 그래서인지 항간에는 ‘(윤부회장) 본인의 의지가 아닌 것 같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의 그룹 내 위상을 감안할 때 타의에 의해서 가전부문을 맡았을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구원투수로 나선 속사정윤부회장이 생활가전총괄을 맡게 된 이유는 뭘까. 재계는 가전부문을 살리건 죽이건 삼성이 올해 안에 결판을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일각에서 ‘배수의 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이다.실제로 그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삼성의 절박함이 일면 이해가 된다. 삼성전자에서 가전은 유일하게 적자사업 분야다. 에어컨, 세탁기 등에서 LG에 뒤져 2위 자리로 밀려나 있다. ‘초일류기업’을 자부하는 삼성이 체면을 구기고 있는 상황이다. 수익도 LG와 비교해 적잖은 차이가 난다.윤부회장은 늘 ‘위기’를 강조하는 경영자다. 수조원의 이익을 내도 입에서는 ‘위기’라는 말이 떠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삼성은 2002년 이후 가전분야에서 강력한 공격드라이브를 걸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시스템에어컨, 드럼세탁기, 김치냉장고, 양문형냉장고 등 백색가전 분야에서 LG전자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양문형냉장고를 제외하곤 여전히 LG전자 등 경쟁사보다 뒤처져 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특히 에어컨의 경우 학교와 건설 시장을 놓고 LG와 육탄전을 벌일 정도였지만 LG의 공고한 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지난해만 해도 이현봉 사장이 국내영업을 맡는 등 조직을 추스르고 대대적인 마케팅비용을 들여 1위 탈환을 노렸지만 이마저도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1,150억원의 영업적자라는 불명예만 얻었을 뿐이다. 실제로 삼성이 경쟁사보다 브랜드 인지도와 자금력이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2003년 경영실적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에 이건희 삼성회장이 여러차례 경영진에 경고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업계에 알려져 있다.다음으로 가전의 위상이 이전과 달라진 점도 윤부회장이 직접 뛰어들게 된 요인이다. 업계는 세계 가전시장이 AV가전의 디지털 전환에 따라 디지털 제품의 성장이 향후 2~3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백색가전도 제품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프리미엄 제품의 성장 기회가 큰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빌트인 제품과 홈네트워킹 제품의 시장잠재력은 향후 엄청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게다가 가전은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TV를 비롯해 냉장고, 세탁기 등은 주방과 거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품이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자사의 브랜드를 알리는 데 있어 놓칠 수 없는 매체인 셈이다. 또 국내영업은 해외수출의 발판 성격이 강하다. 국내 휴대전화가 세계적으로 강한 이유와 마찬가지다. 가전부문에서도 국내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해외에 진출해 현지에서 대접받는 경우가 적잖다. 에어컨과 양문형냉장고가 좋은 사례다.따라서 삼성 가전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절박함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금 심각하게 표현하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인 것이다. CEO의 강한 추진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가전 왜 약한가유독 삼성 가전이 약한 이유는 뭘까. LG에 밀리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의 시각은 비슷하다. 주력업종이 다르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삼성은 반도체와 휴대전화사업에 역량을 모았다.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사양산업으로 여기던 가전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삼성의 가전은 우수인재 유치나 투자순위에서 반도체나 휴대전화에 밀리게 된다. 이런 사정이 장기화되면서 경쟁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반면 LG전자는 가전사업에 꾸준히 투자했다. 99년 이후부터는 프리미엄 제품을 쏟아내면서 가전의 부흥을 주도했다. 이처럼 주력분야가 달랐기에 삼성과 LG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는 무리다. 하지만 삼성이나 LG 모두 사업의 정리를 고민할 정도로 ‘가전’의 앞날을 어둡게 봤다. 사양산업이라는 인식은 함께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LG는 이를 극복했고, 삼성은 그렇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아울려 양사의 주요 경영진을 비교해 봐도 가전에 대한 경험에 국한된 것이지만 삼성이 달리는 느낌이다.LG전자를 보면 김쌍수 부회장의 경우 69년 금성사에 입사해 34년간 창원에서 잔뼈가 굵었다. 디지털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장인 이영하 부사장도 79년 창원공장 품질관리과에 입사해 냉장고 사업부장을 맡는 등 가전분야를 떠난 적이 없다. 중국지주회사 손진방 사장은 68년에 입사해 가전 한 우물만 팠다. 국내영업을 책임지고 있는 송주익 부사장도 LG 에어컨사업의 돌풍을 몰고 온 주역이다.이에 비해 삼성 경영진의 가전 경력은 윤부회장을 제외하고는 일천한 편이다. 윤부회장은 90년부터 3년간 가전부문 대표, 97년 대표이사 부회장에 오른 뒤에도 생활가전분야 총괄책임을 맡은 적이 있어 나름대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시스템가전사업부장인 이문용 부사장은 반도체맨으로 반도체연구소에서 주로 일했다. 지난해 비로소 시스템가전사업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상현 중국전자총괄사장은 비서실 출신이다. 이현봉 국내영업사업부 사장은 인사팀에서 주로 근무했다.LG전자의 경우 김쌍수 부회장을 비롯해 이영하 부사장 등은 10여년간 창원공장의 혁신을 주도한 주인공들이다. 그야말로 창원공장을 세계적인 공장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들이다. 경륜과 실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LG전자는 이들의 오랜 노하우가 큰 힘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가전을 담당하는 한 애널리스트는 “삼성의 우수인재는 모두 반도체로 간 반면, LG는 가전으로 갔다”며 “맨파워의 차이가 지금의 경쟁력 차이를 가져왔다”고 풀이했다.또 생산혁신 과정에서도 LG에 밀렸다. LG의 영업이익률은 10%에 육박할 정도이다. 반면 삼성은 지난해부터 마이너스로 돌입했다. 사실 백색가전은 첨단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 아니다.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러다 보니 누가 고품질 저가격의 제품을 만들어내는지가 관건이다.LG는 이를 빨리 간파하고 80년 말부터 전격적으로 개선활동에 들어갔다. 한때 외부 컨설팅사에서 사양산업인 가전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LG의 경영진은 혁신활동으로 원가경쟁을 이겨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또 한 사람의 컨설턴트가 10여년간 혁신을 관장해왔다. 물론 삼성도 6시그마를 비롯해 개선활동을 했고 적잖은 성과도 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LG만큼 효율성을 얻어내지 못했다.역습 시나리오그럼 윤부회장은 지금의 가전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일까. 삼성전자는 현재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홍보팀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회사 안팎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강력한 구조조정이 예상된다. 인력, 사업, 공장 등 총체적인 구조조정이 강도 높게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윤부회장의 경영스타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세계 1등 제품, 수익창출 등의 용어는 그가 늘 애용하는 것들이다. “낡은 브랜드를 끌고 가면 돈도 안될뿐더러 회사이미지도 나빠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돈을 벌지 못하는 브랜드는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 전자레인지는 이미 해외이전을 결정했다. 이밖에 일반세탁기, 청소기, 가습기, 식기세척기 등 규모가 작은 제품들은 일단 구조조정 선상에 놓일 것으로 예상된다.대신 돈을 벌 수 있는 제품들은 강력한 공격경영으로 시장쟁탈전을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제품으로 보면 양문형냉장고인 ‘지펠’은 안정궤도에 올라섰다는 평이다. 따라서 드럼세탁기, 에어컨, 김치냉장고 등 ‘하우젠’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는 제품에 힘 쏟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에어컨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혈투를 벌여서라도 LG의 벽을 넘어서려고 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스템에어컨의 성장성이 아직 무한하기 때문이다.삼성 가전의 장점은 브랜드력의 우위와 막강한 자금력이다. 따라서 마케팅은 ‘고급화’로 귀결될 것이다. 애니콜은 철저한 고급화 전략을 고수해 큰 성과를 거뒀다. 가전도 애니콜의 성공신화를 벤치마킹할 가능성이 높다. 대리점의 고급화 전략도 계속될 전망이다. 기술력의 보강을 위해서 기존 디지털어플라이언스(DA)연구소를 생활가전연구소로 격상시키고 연구인력을 늘리고 있다. 다만 원가경쟁력에서 LG에 크게 뒤지는 삼성이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주목대상이다. 이미 하청업체에 강한 압박이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생산혁신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삼성전자측은 윤부회장이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홍보팀 관계자들은 “모든 것은 시스템가전사업부 이문용 부사장이 결정하고 있다”며 “윤부회장은 큰 그림만 그리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윤부회장의 등장만으로도 이미 업계는 들썩이고 있다. 어떻게든 수익창출에 나설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향후 1년이 지난 이맘때 윤부회장은 웃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