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업종 기피로 구인난까지 겹쳐, 노사분규와 해외시장 개척도 한몫

안산공단에서 10년 넘게 공장을 운영해 온 D금속은 2003년 봄에 공장을 중국으로 옮겼다. 도저히 일손을 구할 수 없어 주문을 받고도 포기하는 상황이 되자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중국에 간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구인난 걱정은 하지 않을 것 같아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한국 산업의 심장격인 제조업체들의 ‘코리아 엑소더스’(Exodus)가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조업의 ‘패닉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조만간 산업공동화가 가시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제조업 전체가 가히 심각한 위기국면을 맞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기업들 역시 한국을 뜨겠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에서 기업을 하기에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는 얘기다.안산공단을 아우르는 안산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전체의 30%에 달하는 업체가 한국을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공단마다 비율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상당수 업체들이 이미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최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375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조사결과 전체의 30.7%(115개사)가 해외이전을 계획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미 이전했다고 응답한 업체는 7.2%(27개사)로 조사됐다. 특히 계획 중인 업체 가운데 61.7%(71개사)는 향후 1~2년 내에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고 응답, 조만간 한국을 떠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어느 부문까지 해외로 옮길 것이냐는 물음에는 단순생산부문(66.1%), 고부가가치 제품을 포함한 전 생산부문(19.1%), 연구개발 등 핵심부문(14.8%) 순으로 높았다. 이미 이전한 업체가 단순생산부문(81.5%) 중심으로 해외로 옮긴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대신 전 생산부문과 핵심부문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해외진출에 나서는 데는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제조업의 자존심인 삼성전자는 이미 TV 등 전자제품의 80%를 중국 등 해외에서 만든다. 냉장고와 에어컨 등 생활가전도 60%를 해외라인에서 생산한다. 현대차가 2002년 말 가동에 들어간 베이징현대기차도 부품의 대부분을 중국산으로 쓰는 등 현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LG전자는 이미 중국에 생산라인 외에 지주회사를 두고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한창이다. 다른 대기업들도 인건비 부담이 많거나 노사분규 우려가 있는 업종을 중심으로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그렇다면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역시 인력난(25%)이 가장 많았고, 해외시장 개척 및 확보(12.4%), 대립적 노사관계(6.4%), 모회사 거래선의 해외이전(5.8%) 순으로 나타났다.조사결과에서도 나왔지만 역시 인건비 부담은 국내 기업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해외이전의 가장 큰 동기다. 인천 남동공단 내 S전자는 요즘 중국진출을 결정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중국에서는 직원 100명을 쓰는데 인건비로 1,000만원대면 충분하지만 한국에서는 2억원 가량이 든다”며 “인건비가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현실에서 중국행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했다.2003년 8월 한국은행 조사를 보면 한국과 중국의 제조업 임금격차는 2001년 기준으로 13.4배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제조업의 월 급여 평균이 1,319달러인 데 비해 중국은 98달러로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 한은은 “중국 선전에 진출한 삼성SDI 관계자에 따르면 현지 제조인력의 생산성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인건비는 한국과 비교해 거의 10분의 1 수준에 머무른다”고 밝혔다.인건비 문제와 맞물려 구인난 또한 한국탈출을 부추기고 있다. 인건비가 높은데도 막상 생산라인에서 일하려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 일선 제조업체 관계자들의 얘기다. 3D업종 기피 여파로 ‘놀면 놀았지 공장에는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난 결과다. ‘공고생 가운데 80%는 생산현장에 취직하기를 꺼려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심지어 삼성전자 같은 국내 대표기업도 생산직 구인난으로 해마다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후문이다. 한 관계자는 “생산직 가운데 연간 20% 이상이 회사를 떠난다”며 “대학진학이나 좀더 일하기 편한 곳으로의 전직이 주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다른 전자회사나 조선회사 등 생산직 비중이 높은 회사들도 생산라인 직원을 구하지 못해 연초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는 마찬가지다. 조선공업협회는 최근 “2004년까지 부족인력이 5,000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공고생 80% 생산현장 꺼려노사분규 역시 해외진출의 주요인 가운데 하나다. 국내에서 기업을 하려면 노사문제가 우선 안정을 찾아야 하는데 기업으로서는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특히 대기업들의 경우 그동안 국내에서 사업을 하며 노사갈등으로 큰 피해를 봤다는 생각에 가능하면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 최근 몇 년 사이 O전기 등 일부 기업이 구조조정과 관련해 노사갈등이 불거지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도 대기업들을 움츠리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다.노사갈등과 관련해 회사측은 ‘해고를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회사가 극한 상황에 몰려 구조조정을 하려 해도 걸림돌이 많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설명이다. 결국 이런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기업활동이 가능한 중국 등 제3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정부의 규제가 기업들을 해외로 내몰기도 한다. 그동안 대표적인 것으로 지목된 것이 공장건축 총량제다. 특히 수도권에 새로 공장을 짓거나 증설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막히는 바람에 일부 업체의 경우 다른 방법을 찾다가 해외로 빠져나간 사례가 있다. 다만 총량제는 많은 논란 끝에 정부가 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가고 있어 일단락될 것으로 전망된다.하지만 다른 규제도 만만치 않아 이 문제는 계속해서 뜨거운 감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미국 앨라배마주의 사례는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다. 현대차가 주정부에 공장건설 문제를 타진하자 주지사가 직접 나서서 규제를 푸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결국 현대차 공장을 유치했다. 멕시코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삼성전자 공장 유치를 위해 발벗고 뛰어던 일화는 유명하다.요즘 기업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한국에서 기업 못하겠다고 난리다. 여건이 너무 열악해 다른 돌파를 찾지 않으면 안될 지경까지 왔다고 하소연한다. 기업 스스로 해결하라고 방치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 보인다. 기업 스스로의 뼈를 깎는 노력 외에 사회적인 관심과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