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지혜로 ‘퇴직자 지원’ 새 삶

그 자신 반평생을 월급쟁이로 산 퇴직자다. 남들보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은 것도, 새 일에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것도 아니다. 특별한 컨설팅 교육을 받은 일은 더더욱 없다. 퇴직자들의 재기를 돕는 일로 ‘새로운 시작’을 한 이낙기 현대보우회 사무국장(63)의 무기는 바로 풍부한 간접경험과 인생을 사는 지혜다.최근 <퇴직하고 뭐하지? designtimesp=24566>(황금가지)라는 책을 펴낸 그는 ‘퇴직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좁게는 현대해상 퇴직자 모임인 현대보우회 살림을 꾸리고, 넓게는 회사 울타리를 나서는 모든 퇴직자들의 재기를 돕는 일을 한다.환갑이 넘어 자영업의 성공비결을 담은 서적을 펴낸 것도 새로 개척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더하기 위해서다. 일터와 머릿속 관심사가 온통 ‘퇴직자 지원’으로 통일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95년 9월 55세로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체력이나 정신력이 청년 못잖은 때였지요. 남들은 정년까지 근무했으니 복받은 거라고 하지만, 그 공허함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겁니다. 퇴직으로 인한 동병상련을 겪었기에 지금 하는 일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 것이겠지요.”퇴직자 모임 정비하며 지원활동 시작처음부터 퇴직자 지원활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퇴직 후 5년 만인 2000년 11월 현대보우회에 몸담기 전까지 이씨 역시 ‘노년을 어떻게 보낼까’를 궁리하던 평범한 퇴직자였다. 다른 퇴직자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음은 물론 스스로의 퇴직 후유증을 치유하기에도 벅찬 시간을 보내야 했다.젊은 시절 국어교사로 일하다 교원공제회를 거쳐 76년부터 현대해상화재보험에서 근무한 이씨는 대구지점장을 끝으로 20년 보험맨 생활을 접었다. 이후 아내와 함께 직업소개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상한’ 선입견과 IMF 위기까지 겹쳐 별 소득 없이 그만두고 말았다. 고교시절부터 관심을 둔 에스페란토(국제보조어)에 심취해 국제대회를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새로운 일’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그렇게 4~5년을 지내다 현대보우회 운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여느 퇴직자들처럼 가끔씩 사무실에 들러 담소와 바둑을 즐기는 정도였다.“언제부터인가 회사가 퇴직자를 위해 명동 한복판에 사무실을 왜 내줬을까 생각해 봤지요. 늙은이들이 모여서 시간이나 때우는 장소로 두기에는 설치 목적과 공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무언가 생산적인,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모임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늘어난 젊은 퇴직자들을 끌어안아야 했습니다.”이씨와 의견을 같이하는 퇴직자들과 함께 모임을 새롭게 정비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보우회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3개월마다 한번씩 4페이지짜리 회보를 만들고 홈페이지(www.hdob.net)를 새로 구축해 젊은 퇴직자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e메일 네트워크를 만들어 회원들의 경조사를 공유하고 새 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공간과 사무설비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물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르는 노년층 퇴직자들도 편하게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퇴직자 사랑방’ 수준에서 체계화된 퇴직자 단체로 겉과 속이 확 바뀐 것이다.“자신이 퇴직한 회사에 끝까지 좋은 감정을 갖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퇴직자를 영원한 사우로 생각하는 기업들도 드물고요. 하지만 모임을 정비하고 보니 회사와 퇴직자 모두 윈윈(Win-Win)하는 효과가 나더군요.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회보를 통해 알리니 홍보효과가 대단하고, 보우회의 존재를 회사에 각인시키니 그만큼 위상이 올라갔지요.”현재 현대해상은 현대보우회의 운영자금 일체를 지원하는 한편 중요한 회사 행사에 시상자로 초청하는 등 선배에 대한 ‘예우’를 아끼지 않고 있다.2년간 창업자 36명 인터뷰, 책 출간현대보우회를 정비하느라 퇴직자들과 일상을 함께하면서 이씨는 새로운 요구를 접했다. IMF 위기 이후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퇴직자가 양산되고 있지만 이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체감한 것.모임에 나오는 퇴직자 중에서도 창업에 실패해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들을 지원할 방법을 찾다 선택한 것이 바로 책 만들기. “퇴직자에 기여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 80%, 나머지는 책을 잘 만들어 히트하면 돈이 벌리겠다는 마음으로” 결심을 했다.우선 주변에서 퇴직 후 창업으로 성공한 사례를 찾기 시작했다. 현대해상 퇴직자를 비롯, 두세 사람 건너 소개받은 생면부지 창업자, 길 가다 만난 사람까지 총 36명을 일일이 인터뷰했다. 녹음기를 들고 스스로 만족감이 들 때까지 쫓아다닌 게 2년. 발로 뛴 생생한 취재를 바탕으로 16명을 추려내 책을 만들었다.출간 후 반응은 썩 좋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퇴직자 양산시대가 열리고 있고 그에 따라 퇴직 후 창업에 어느 때보다 관심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주요 신간으로 소개됐고 한 대형 서점은 ‘추천도서’로 선정하기도 했다.“제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합니다. 굳이 창업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이들에게는 배울 점이 무척 많아요. 어떤 젊은이는 인생을 조금 알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한발 앞서 실패와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담이 새롭게 시작하는 초보창업자들의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이씨는 책 쓰기를 비롯한 퇴직자 지원활동이 “모래알만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라며 겸손해했다. 또 “자금이 충분해서 성공했다는 사람은 아직 못봤다”며 “문제는 돈이 아니라 정신력과 체력”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봉급쟁이가 자영업자가 되는 것은 누에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별다른 시련 없이 순탄하게 성공하려는 것은 환상일 뿐이지요. 특히 정신력과 체력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재취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넥타이 매던 때의 습성부터 버려야 해요.”그의 이야기는 어느 창업 컨설턴트보다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스스로 겪은 생생한 경험담과 취재원을 통해 다양한 간접경험을 한 덕분이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몇가지 일을 추가로 구상 중이다. 물론 퇴직자 재기를 돕는다는 큰 틀은 변함이 없다.퇴직 후 자영업 Success Key●돈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력과 체력이다.호되게 단련시켜라.●시련없이 성공하려는 ‘환상’을 버려라. 시행착오도 재산이다.●쓸데없는 자존심은 내다버려라. 넥타이 매던 습성이 실패를 부른다.●영원한 현직은 없다. 퇴직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