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된 아파트 평당 3,300만원… ‘강남 속 강남’ 등극

“엊그제는 경남 창원에서 전화를 했더군요. 아이가 대치초등학교나 대곡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근처에 아파트 하나 구해 달라고요.”서울 강남구 대치동 로얄공인에서 근무하는 김은희 실장은 올 들어 전국에서 걸려오는 상담전화를 여러차례 받았다. 강북에서 이사 가려고 한다는 전화는 부지기수. 지방에서 아파트를 구해 달라는 사람 중 절반 정도는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등 전문직 남편을 둔 주부들이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일찌감치 대치동으로 들어가겠다”는 게 이사를 원하는 첫째 이유다. 김실장은 “지방의 집을 팔아 전세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지난 2월 김영인씨(39ㆍ가명) 부부는 대치동 한보미도아파트 46평형으로 이사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1학년인 남매를 아파트 바로 앞 대곡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전까지 서대문구 연희동의 빌라에 살며 북아현동의 사립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냈던 이 부부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이왕이면 더 좋은 진로를 개척하게 하기 위해 대치동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 가족은 연희동 빌라를 처분했지만 8억원이 넘는 아파트값을 감당하지 못해 4억원에 전세로 입주했다. 그나마 방학 때라 매물이 달려 두달 이상 대기해야 했다고.D증권 간부로 재직 중인 박현철씨(가명ㆍ41) 가족도 한참을 망설이다 지난 8월에 대치동 30평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박부장은 “대치동 중학교는 전학을 받지 않아 큰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사를 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며 “하지만 대치동 아파트값 상승세가 뚜렷한데다 아이들도 좋다고 해 이사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1년만 일찍 결정했으면 1억원 이상 낮은 값에 집을 살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대치동처럼 특정한 지역이 경제뉴스의 핵심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교육’과 ‘부동산’이라는 최고 관심사가 대치동이라는 동네와 직접 연결돼 있다.지난 10월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강남 집값과 교육문제는 인과관계가 별로 높지 않다”고 말한 뒤로 거센 갑론을박과 함께 대치동 사례가 집중 거론됐다. 대치동에서 만난 공인중개사들은 “자녀교육에 목숨 거는 부모들이 있는 한 대치동 집값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그나마 이곳으로 진입하는 신규 수요는 천정부지 집값도 감당할 수 있는 중상류층이기 때문에 IMF 체제와 같은 급격한 경기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집값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선경아파트 근처의 한 중개업소에서는 “내년 신학기에 맞춰 아이를 전학시키고 싶어 하는 이사 수요가 중개업소마다 4~5명씩 대기 중”이라고 말했다. 조건에 맞는 매물만 나오면 이번 겨울방학에 당장 이사를 하겠다는 이들이다. 적어도 대치동에서는 ‘교육 = 집값’이라는 공식이 유효한 셈이다.대치동에서 회자되는 공식은 또 있다.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아이를 명문대에 보낸다’는 것. 경제력이 없으면 대치동에 들어오지 못하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학원이나 과외교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진다는 말이다.김영인씨는 “지난 2월 이사를 한 다음날 경비실을 통해 ‘아이가 몇 살이냐’는 전화를 받았다”며 “이사 오는 것을 유심히 본 이웃집 주부가 자기 아이가 1학년인데 혹시 나이가 같으면 그룹과외를 엮어주자고 제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대치동 교육 인프라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초등학교 1학년인 김씨 막내딸은 현재 국어, 수학, 영어 3과목을 비롯해 피아노, 플루트, 발레, 수영 등 총 7가지 과외교육을 받고 있다. 명문대에 가려면 예체능 내신도 좋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과외를 충분히 받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5학년인 큰아들까지 합하면 한달에 300만원 정도를 과외비로 지출하고 있다.김씨는 또 “좋은 과외교사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있으면 이웃 주부들과 함께 ‘조사’를 거쳐 과외를 바꾸기도 한다”고 전했다. 과외교사, 학원 리스트도 수시로 돌아 학부모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사교육 종사자는 짐을 쌀 수밖에 없다고. 한 공인중개사는 “이곳 학부모들은 유치원에 보내면서부터 자녀의 서울대 입학을 위해 시간을 바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우성·선경·미도 ‘황제 아파트’로 꼽혀상황이 이러니 집값은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는다. ‘수능이 어려운 해에는 집값이 더 오른다’는 말도 돈다. 특히 방학 때면 이 일대 아파트는 일제히 오른다. 그중에서도 ‘빅3’로 불리는 우성, 선경, 미도아파트는 방학 때만 되면 1억원 안팎이 순식간에 뛰는 ‘황제 아파트’로 꼽힌다. 84년에 입주한 우성1차 45평형은 최고 15억원으로 평당가가 3,300만원이 넘는다. 인근 은마아파트처럼 재건축 기대치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순수 아파트 가격이 그렇다.특히 초ㆍ중학생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최고급아파트 타워팰리스가 부럽지 않다는 게 대치동의 ‘진리’로 통한다. 브랜드파워 1위 삼성래미안이 20년 된 아파트에 밀리는 곳도 대치동이 유일하다시피 하다.이유는 간단하다. 사교육 1번지 대치동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빅3가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성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대청중학교는 특목고 진학률이 높은 명문중학교로 이름 높다. 이 학교는 전국에서 밀려드는 전학 문의에 몸살을 겪다 지난해부터는 아예 전학을 받지 않기로 했다. 때문에 이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대치초, 대곡초등학교 5~6학년에는 전학생 수가 급증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통계에 따르면 대치초등학교 5학년 전학생은 2001년 229명에서 2003년 9월 현재 367명으로 늘었다. 6학년생은 288명에서 445명으로 늘어나 더 많은 수가 유입됐다.한 학부모는 “두 초등학교 자모회에 가 보면 전국 팔도의 사투리를 들을 수 있다”며 “전학이 너무 많아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단점이 있지만, 대부분 학부모 직업이나 생활수준이 비슷해 서로 어울리는 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이처럼 대치동 신드롬의 배경은 표면상 ‘교육’으로 정리되지만 실제로는 ‘신분 업그레이드’와 ‘평생 네트워크 확보’를 원하는 심리라는 분석도 있다. 김우희 저스트알 상무는 “이른바 명문학교가 위치한 곳은 대부분 중산층 거주지”라고 밝히고 “대치동은 그중에서도 ‘정점’이라 할 수 있는데, 거주민의 소득이나 교육수준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한 지역 내에서 명문 초ㆍ중ㆍ고를 이어 다닐 수 있는 경우는 드물어 어릴 때부터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명문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평생 간다’는 확신이 지금의 대치동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실제로 ‘대치ㆍ대곡초-대청중-단대부고(남)ㆍ숙명여고(여)’는 대치동의 ‘FM 코스’로 통한다. 여기에 특목고 바람이 불면서 대원외고, 한영외고 등이 고등학교 코스로 추가됐다.H증권 도곡지점 김모 차장도 “고객들과 만나다 보면 대치동에 이사를 오는 것만으로도 업그레이드된 신분ㆍ계층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느낀다”고 밝히고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성장한 후에도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많다”고 전했다.이사 온 지 2년 되었다는 한 학부모는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는 “교육 인프라와 함께 이곳의 ‘수준’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아이들이 초ㆍ중ㆍ고를 이 동네에서 다니면서 비슷한 수준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어른이 된 후 사회생활과 결혼까지도 그 수준에서 유지하기를 원한다. 최상류층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상류층의 같은 부류로 끼리끼리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학부모를 대치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라고 설명했다.2000년 전후부터 등장한 ‘대치동 키즈’들이 어떤 형태의 ‘신분’ 혹은 ‘계층’을 형성할지 두고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