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출판가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상당수 업체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은 반면, 한쪽에서는 전문화 물결이 거세게 몰아쳤다. 더 이상 주먹구구식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셈이다.파주에 출판단지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기운이 싹텄고, 외환위기를 비껴간 업체들은 적극적인 투자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강남의 테헤란벨리를 연상시키듯 마포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출판사들이 몰려들며 새로운 ‘출판동네’를 형성했다. 여성잡지에는 새로 신축한 출판사 빌딩이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외형적인 변화 못지않게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전문화다. 기존에는 기획, 영업, 홍보 등을 출판사 내에서 일괄적으로 하는 것이 대세였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업체들도 직원 4~5명이 출판과 관련된 일을 도맡아 했던 것. 자연 전문성이 떨어지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관행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기획을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직원 2~3명으로 꾸려가는 미니 출판사는 물론이고 국내 출판가를 좌지우지하는 업체들 역시 외부의 전문가를 활용하는 사례가 점점 느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이유는 시장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출판의 영역은 크게 세분화됐다. 가령 경제경영분야만 하더라도 주식, 재테크, 부동산, 자기계발, 마케팅 등으로 나뉜다. 한사람이 이 분야만 하기에도 벅찰 정도다. 반면 독자들의 욕구는 끝이 없다. 좀더 새로운 책, 또는 깊이 있는 책을 요구한다.책을 내는 곳 입장에서 자체적으로 모든 분야를 기획하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각 분야별 전문가가 기획에 참여해야 하는데 출판사 역량으로 이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기획을 담당할 직원을 무턱대고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결국 외부에 기획을 아웃소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무엇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인건비에 대한 부담 없이 외부의 전문인력을 기획에 적극 참여시키는 효과가 있다. 기업들이 연구개발 분야를 외부 연구소에 맡기는 격이다.어떤 업체들이 뛰나출판기획 전문업체 가운데 선두주자는 한성출판기획(대표 박영욱)이다. 지난 98년 ‘기획전문회사’를 표방하고 업계에 등장한 이 회사는 다양한 출판물을 기획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출판기획을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정착시킨 주인공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까지 받고 있다.지금까지 기획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공부가 쉬워지고 일이 즐거워지는 두뇌혁명 designtimesp=24376> <돈에 당당한 여자가 아름답다 designtimesp=24377> <합법적으로 세금 안내는 110가지 방법 designtimesp=24378> <엄마가 들려주는 태교동화 아빠가 들여주는 태교동화 designtimesp=24379> 등이 있다. 연간 40~50권 정도를 기획하고 있으며 실용서분야가 특히 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는 어린이책 전담팀을 새로 만들어 기획영역을 크게 넓혔다.거래하는 업체도 다양하다. 중견 출판사인 프리미엄북스를 비롯해 자음과 모음, 바다출판사, 청년정신, 프리미엄북스, 아라크네, 시대의 창, 창작시대, 미래M&B 등이 한성출판기획과 손잡고 일을 한다. 또 신문사를 끼고 있는 조선일보 출판부와 한경BP 등도 주요 고객 가운데 하나다.박대표는 중견 출판사인 창작시대 기획팀 출신으로 98년 독립 이후 감각과 성실성을 무기로 회사를 키웠다. 당초 자신을 포함해 2명으로 출발한 회사를 지금은 직원 9명의 어엿한 전문기획사로 일궈낸 것. 김영사 박은주 사장이 ‘도대체 어떤 회사인지 궁금하다’며 한성출판기획 사무실을 전격 방문한 일화도 있다.책아책아(대표 하현주)는 지난해 3월 기획에이전시로 출발한 이후 출판가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하우PC 편집장 출신인 하대표가 새출발하면서 출범시킨 이 회사는 톡톡 튀는 기획 마인드와 기발한 책제목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비상 designtimesp=24386> <감성마케팅 designtimesp=24387> <월급만으로는 살 수 없다 designtimesp=24388> <나, 인터넷에 가게 차렸어 designtimesp=24389> <3년 빨리 성공하는 이메일 성공기> 등 50권이 넘는 책을 기획했다.기획의 기본 방침은 ‘재미없고 보기 안 좋은 책은 절대로 안 만든다’는 것. 기획에서 제작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해 출판사 입장에서는 인쇄와 판매만 하면 된다. 지난해 회사를 만들 당시 도움을 준 영진닷컴과 그동안 작업을 많이 했고, 최근 들어서는 넥서스와도 호흡이 잘 맞아 <비상 designtimesp=24392> 등을 기획해줬다.두비컨텐츠는 지난해 중앙M&B와 2년간 책 13권을 만들어 주기로 계약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두비는 중앙M&B로부터 선인세 개념으로 무려 5억3,000만원을 받아 출판가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넥서스 주간 출신 김민기 대표가 이끄는 두비는 어학 등 실용서적에 강점이 많은 조직으로 유명하다. 김대표는 넥서스 시절 <영어회화 365단어로 코쟁이 기죽이기 designtimesp=24397> 등 숱한 화제작을 기획해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 업계 최초의 억대 연봉자로도 유명하다. 현재 5명의 기획전문인력을 두고 있으며 중앙M&B와 계약한 일을 마무리 하는 게 급선무인 상황이다.이밖에 직원 규모는 조금 작지만 분야별로 능력을 인정받는 전문기획사들은 또 있다. 대부분 2~3명이 팀을 이뤄 뛰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지만 업계에서는 최근 들어 많이 생겨 10여개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기획에이전시 수입원은보통 책을 직접 쓰는 필자들은 출판사와 전체 판매액의 8~10%를 인세로 받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간다. 예컨대 인세 10%로 계약하는 경우 1만원짜리 책이 1만부 팔리면 1억원의 수입이 발생하므로 이중 1,000만원을 필자가 가져가는 식이다.그렇다면 기획전문회사들은 출판사와 어떤 조건으로 계약할까. 일단 필자와 마찬가지로 인세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계약조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2~3%를 받는다. 얼핏 보면 그 정도 받아서 운영이 되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규모가 큰 회사의 경우 연간 30~40권씩 기획하기 때문에 이를 합치면 적은 돈이 아니다. 게다가 인세 외에 별도의 계약금도 있다. 보통 권당 200만~300만원씩 받는다.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기획에이전시들 가운데 큰돈을 번 곳은 아직 없다. 아직은 연륜이 길지 않아 인세수입이 기대만큼 많이 들어오지 않는 까닭이다. 하지만 기획 도서가 수백권 쌓이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장래도 무척 밝아 기대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출판평론가 김진욱씨는 “외부 기획전문가를 활용하는 것은 이미 대세로 굳어졌다”며 “앞으로 2~3년간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큰돈을 버는 기획사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돋보기|프리랜스 전문기획자들200~300명 추산 … 억대연봉자 등장200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한국의 부자들 designtimesp=24417>이다. 전국적으로 부자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 책은 지금까지 약 35만부 정도 팔려나가며 빅히트를 기록했다.그렇다면 이 책 밑그림을 그린 기획자는 누굴까. 다름 아니라 프리랜스 전문기획자로 활동하는 최용범씨(36)다. 더난출판 기획팀장 출신인 최씨는 3년 전 독립해 전문기획자로 활동하며 <한국의 부자들 designtimesp=24420>을 기획했다. “부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호기심에서 책을 기획했다”는 최씨는 “기대 이상으로 인기를 끌어 요즘 들어서는 큰 부담감까지 느낀다”고 말했다.최씨말고도 출판계에는 프리랜스 기획자들이 많다. 줄잡아 200~300명은 헤아린다는 것이 업계의 추산이다. 특히 최근 들어 기획분야가 각광을 받으면서 출판사 기획팀 출신들이 잇따라 독립하는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조건은 기획에이전시와 비슷하다. 대부분 인세수입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히트작을 잇달아 터트린 사람들은 연봉이 웬만한 직장인을 능가한다.연봉이 1억원대를 넘는 전문가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른 일부 특급 기획자들 역시 수입이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반면 히트작을 내지 못하면 박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는 출판사의 객원기획위원으로 뛰며 충당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대개 월 100만원 안팎을 받는다.Interview | 박영욱 한성출판기획 대표“출판사 인식 확 바뀌어”출판가에서 박영욱 대표(36)의 부지런함은 정평이 나있다. 토요일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일요일도 쉬지 않고 출근한다. 물론 평일은 말할 것도 없다. 기획에이전시를 만든 이후 지금껏 휴가 한번 제대로 갖다온 일이 없을 정도다. 다음은 국내 최대 규모의 기획에이전시를 이끌고 있는 박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기획전문회사를 만든 동기는.출판도 이젠는 전문화시대다. 출판사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 특히 기획분야는 많은 전문성이 요구된다. 직원 하나 뽑았다고 바로 기획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훈련을 받아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만큼 출판사가 제대로 못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내 이를 해결해주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봤다.고객인 출판사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처음에는 다소 주저했다. 신뢰성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획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좋은 반응을 받자 태도가 달라졌다. 요즘에는 오히려 출판사 쪽에서 먼저 제의를 해 올 정도로 적극적이다.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역시 아이디어다. 기획의 성패는 어떤 책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린 만큼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국내외 책을 보면 다듬는다. 특히 해외에서 열리는 북페어는 빼놓지 않고 견학한다. 새로운 충격을 받기 위해서다.필자관리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매우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좋은 필자를 확보해야 좋은 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기획안이 있더라도 필자가 없으면 그만이다.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기획만 하지 말고 출판을 직접 할 생각은 없는가.새로운 저자를 발굴해 한국출판문화를 다각화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기획을 소홀히 하고 외국서적 번역에만 골몰한다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실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외국출판물에 잠식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하는 일이 어렵지만 많은 자부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