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문제’로 나라가 어지럽다. 독일의 한 대학에서 사회철학을 가르친다는 사람…. 하버마스의 제자이며 한국에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송교수가 하버마스로부터 어떤 지적 전통을 물려받고 있는지 필자는 과문해서 알지 못한다. 북한 당국의 서열 20위 고위인사라는 것이고 보면 스스로의 주장대로 경계인이라기보다는 한쪽을 선택한 또는 선택했던 인물임에는 변함이 없다. 경계인이라면 아마도 최인훈의 인물, <광장 designtimesp=24302>의 이명준이 적합할 것이다. 남도 북도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념시대의 희생자 이명준 말이다. 결국 남중국해 어디쯤에서 뱃머리를 내려서는….그를 김철수에 비길 수는 없다. 김철수와 이명준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선택했던 자와 선택할 수조차 없었던 사람은 음지와 양지만큼 다른 것이다. 사실 오늘의 주제는 송교수가 아니다. 그의 정신적 토양이라고 말해지는 독일 사회학이며 하버마스가 속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며 그들의 사상이다. 송교수는 뮌스터대에서 ‘반미주의’ 강좌를 개설해놓고 있다고 돼 있지만 ‘기술경제사회’ 또는 ‘경제인’에 대한 적개심이나 적대의식은 독일 사회학의 주된 관심사였고 철학의 기초였으며 학문적 투쟁의 주된 공격목표였다. 고도산업사회에 대한 비판과 물질주의에 대한 공세와 인간소외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제기가 그들의 지적 전선이다.어떤 사안 또는 조직에 대한 반대가 맹목적으로 그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성으로 옮아가는 현상은 일상에서조차 너무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본주의 기술사회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친북 좌파, 나아가 북한 정권의 고위직으로 구체화되는지 자못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것을 지식인 개인의 고민과 인생행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송교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실 최근 우리사회에는 지난 시절의 ‘경제만능적’ 제도와 관행, 권위적 지배구조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기류가 형성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경제만능적 제도와 관행, 그리고 정치체제가 배태시킨 허다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며 유신체제로 상징되는 폭주하는 경제우위론, 개발연대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허다한 갈등과 억압적 구조가 지금까지 우리 모두를 일대 혼돈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바로 여기에 송교수 문제, 그리고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반기업 정서, 반경제 정서의 뿌리가 있다. 송교수 문제라고 함은 인간 송두율의 문제가 아니라 ‘송교수를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생각들이 구축해 놓은 이데올르기’가 오히려 본질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설픈 몽상가라고 말하면 어울릴 만하겠지만 시장체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층이 오히려 가장 반시장적이라고 할 만한 이념의 소외, 사유의 전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누가 저잣거리를 좋아할까만 시장을 비난하고 기업을 비난하고 그것을 인간소외의 기제로 생각하는 인간유형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빈곤은 강요되고 소외가 강요되며 인간존엄성이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두지 않을 수 없다. 하버마스며 아도르노가 속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르쿠제는 이런 명제를 남겼다.“기업의 자유는 처음부터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일할 수 있는 자유 또는 굶주릴 수 있는 자유처럼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고통과 불안 공포를 안겨주었다. 기업의 자유 따위가 소멸되는 것은 문명의 가장 큰 성취의 하나가 될 것이다.”문제는 이런 정신이라면 북한형 전제주의 사회로 전락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점이다. 송두율이 굳이 간첩이어야 할 이유조차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