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경협 남기고 빈손으로 떠나다

‘살아야 한다’는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을 거스를 만한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국내 최대 재벌(현재는 많이 퇴색했지만)의 후계자, 민족통일의 기반을 닦은 대북사업의 선구자, 1남2녀 단란한 가정의 가장…. 이런 외피적인 모습들만 보면 그의 선택이 선뜻 이해되지 않음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빈손으로 가는 죽음 앞에서 부자, 빈자 운운하는 것이 무의미하겠지만 그는 너무나 많은 빛과 함께 빚을 살아있는 이에게 남기고 갔다. 대북사업의 향방, 현대그룹의 미래, 국가경제에 미치는 파장…. 이 모든 게 그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혼미해졌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성공한 기업가 정몽헌 회장고 정몽헌 회장은 성공한 기업가이다. 1975년 현대중공업 말단사원으로 현대그룹에 입사한 정회장은 81년 현대상선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계열사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84년 현대전자의 대표이사를 맡은 정회장은 주력사업으로 반도체사업을 추진했다. 당시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사업인지라 주위의 만류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고 정주영 명예회장조차 사업성을 이유로 한때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회장은 뚝심 하나로 밀어붙여 결국 현대전자를 90년대 한때 삼성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반도체회사로 키웠다. 자동차, 선박, 건설 등 중후장대(重厚長大)형 산업이 주를 이루던 현대그룹 안에서 반도체사업을 보란 듯이 성공시키면서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이후 96년 현대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이듬해 현대종합상사 대표이사 회장을 거쳐 98년 정몽구 현 현대자동차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 공동회장 자리에 올랐다.정회장은 98년 그룹 공동회장 취임과 동시에 금강산관광 등 대북사업을 주도하면서 정명예회장의 강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2000년 3월의 이른바 ‘왕자의 난’ 때는 정몽구 회장을 제치고 현대그룹의 법통을 정식으로 승계했다.정회장과 정치권의 악연의 시작은 지난 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명예회장이 92년 대통령선거에 뛰어들자 6공 정부는 정몽헌 회장을 현대상선 비자금 조성 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정명예회장의 대통령선거 출마를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정회장을 구속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현대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도 함께 실시돼 1,308억원을 추징당했다.대선에서 패배한 후 현대그룹은 YS정권 내내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대북사업은 물론 당시 그룹의 숙원사업이었던 종합제철소 사업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98년 DJ정부가 들어서면서 현대그룹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향이 이북인 정명예회장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계기가 필요했던 DJ정부의 코드가 맞아떨어지면서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급물살을 탔다. 소 1,000마리를 이끌고 이북 고향을 찾아가는 장대한 이벤트를 연출했던 정명예회장 부자는 금강산관광을 성사시키면서 대북사업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그사이 현대그룹의 외형도 급격히 커졌다. 빅딜 형식으로 LG반도체를 인수하고, 법정관리 상태였던 기아자동차를 인수했다. LG반도체 인수는 경제 논리보다는 정권 논리가 더 많이 작용했다는 논란으로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빅딜을 끝까지 거부했던 LG 최고위층 인사는 LG반도체를 놓친 것에 대해 아직까지도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는 후문이다.LG반도체 빅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몽헌 회장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하이닉스(옛 현대전자)는 합병 당시부터 떠안고 있던 과도한 부채와 반도체가격 폭락으로 유동성위기를 겪다가 2001년 대주주 지분 완전감자로 정회장의 손을 떠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리한 대북송금과 금강산관광사업으로 그룹 전체의 유동성이 악화되면서 정회장의 영향력 아래 있던 현대상선과 현대종합상사가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고, 현투증권 등 금융 계열사들에 대한 경영권도 잃게 됐다.선친 유지 마지막까지 충실히 수행뿔테안경의 외모, 소탈하고 검소한 성격,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추진력…. 정회장은 누가 봐도 정명예회장을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 정명예회장도 그런 아들을 인정했고, 자신의 숙원사업인 대북사업을 계속 이어나갈 후계자로 지목했다.정회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선친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다. 1억5,000만달러가 넘는 회사 자금을 북한에 송금했고, 사업성이 없다고 판정받은 금강산관광사업을 끝까지 고수했다. 계열사가 위기에 빠지고, 해체되는 최근까지도 육로를 통해 북한을 오가며 개성공단 조성사업에 전념했다.그 과정에서 정회장 자신은 물론 한국경제도 많은 것을 잃었다. 현대 계열사들 가운데 많은 우량회사들이 부실기업으로 전락해 국가경제에 주름을 깊게 했고, 정회장 자신도 대부분의 재산은 물론 목숨마저 제물로 던졌다.과연 잃기만 한 것일까.민족대립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는 후세의 사가(史家)가 판단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노무현 정부 경제정책 집중 분석때늦은 불법파업 대항권산업자원부는 최근 노조의 불법파업에 기업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대응수단을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자료를 내놓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의 건의를 수렴해 노동부 노사관계선진화 기획단에 12개 노동정책 개혁과제로 제출했다고 한다.산자부 제출안의 골자는 대강 다음과 같다. 정리해고 사전통보기한을 60일에서 30일로 줄이고, 해고과정에서 노조와의 협의도 최소화하고, 법정퇴직금을 폐지하는 대신 기업연금제를 도입하고, 노조의 부당노동행위 규정을 신설하고, 노조전임자를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파업의결 정족수를 과반수에서 3분의2로 올리고, 파업기간 중 대체근로를 허용하자는 것 등이다.산자부 제출안이 최종 정부안으로 채택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노무현 정부의 노사정책이 기본적으로 노조의 권한을 줄이는 쪽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산자부 제출안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최근 타결된 현대자동차 노사 임금협약이 지나칠 정도로 노조에 많은 것을 양보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금 8.6% 인상에다 성과급 200%, 생산향상 격려금 100%를 합치면 총액 기준 인상액은 25%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노조측에서는 파업기간 중 발생한 임금손실을 보전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높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임금 근로자들이 보기에는 박탈감이 느껴질 정도로 높은 것만은 분명하다.국내 대기업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다. 현대자동차에서 14년간 근무한 노동자는 평균 연봉 4,700만원을 받고 있으며 현대중공업 15년차 근로자도 4,700만~5,000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 15년간 일한 (주)SK 총반장급의 연봉은 7,000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문제는 국내 대기업들의 임금이 계속 높아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향후 2~3년 내에 중국에 현지공장을 설립하는 독일의 유수기업들과 치열한 판매경쟁을 해야 한다. 내수시장을 과점한 현대ㆍ기아자동차가 국내 판매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이익을 남길지, 해외에서도 일본산 차들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판매를 늘리고 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투명하다.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년이 58세까지 확고히 보장돼 새로 일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현대자동차에서 일할 기회조차 거의 없다. 대졸 취업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1970년대와 80년대에는 고속 경제 성장으로 일자리가 계속 늘어났다. 노동조합의 일자리 지키기가 신규인력의 진입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연간 5% 성장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다. 취업자가 실직자가 되고, 실직자는 쉽게 취업자가 되는 길을 터줘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거꾸로 간 길이 멀어질수록 되돌아오는 길은 더 힘들고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현승윤ㆍ한국경제신문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