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만손 시계의 성장세가 무섭다. 법인 설립 최소 자본금인 5천만원만 갖고 사업을 일구기 시작한게 88년 4월인데, 중소기업의 첫번째 고비라는 「매출 1백억원 고지」를 불과 6년만에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그보다 훨씬 더 역사가 오래됐으면서도 아직껏 1백억 단위 밑에서 고전하는 기업이 얼마나 많으며, 이 고지를 눈앞에 두고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기업인은 또 무릇 얼마나 될 것인가.그런데 지난해는 2백억원에 도달했고 올해는 3백억원이 목표란다.내친 김에 김기문 사장(41)에게 목표를 좀더 장기적으로 얘기해달라고 하자 내년 4백억원, 98년이나 99년에 가서는 「중견기업 회원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5백억원을 펼쳐보인다. 얼핏 생각하기에손목시계로는 도저히 큰 돈이 될 것 같지 않은데 김사장은 이 단품만으로 모든 창업자의 꿈인 「5백억 매출」을, 그것도 회사 창립10년만에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현재는 마이너 리그에 속해있으나곧 메이저 리그에 진입해 「빅 4」를 형성한다는 당찬 포부다.성장에는 당연히 그것을 가능케 한 동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그 동인은 의외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문자 그대로 「초고속 성장」의 가도를 달려왔다해도 과언이 아닌 로만손 시계도 사실 발전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변에서 평하는 로만손의 성장요인 역시 △창업자의 동 업종 경험 △위기에서 배운 사업 교훈의적절한 현실 적용 △철저한 자기 브랜드 전략 △우량바이어 정책△디자인부문 집중투자 등으로서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이 동인들을 실제 행동에 옮기느냐의 여부가 서로 다른 결과를 빚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런 관점에서 볼 때 로만손은 비교적 교과서대로 사업을 추진해온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김사장은 시계사업에 대해 영업및 제조 노하우와 경영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작은시계회사에서 6년여를 근무한 경력이 있고(영업이사) 퇴사 뒤 잠시공백기를 거치고는 곧 동종 업계로 되돌아왔다. 물론 시계 사업의경험이 전부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기에 복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약간의 번민은 있었다고 한다.◆ 1국1바이어 엄선·디자인 개발 적극 투자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시계사업은 인력이 적게 들고 자본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 잘만 운영하면 자금 회전이 빠르기 때문에 소자본 갖고 하기에는 더 없이 적격이다. 반면부정적인 요소로는 그 당시 4개 대형업체가 시장의 95%를 장악하고있고 나머지 5%를 30∼40개 군소업체가 나눠 갖는 형국이었다. 어린 로만손의 앞길이 어떠하리라는 점은 보지 않고도 훤했다. 더구나 봉급쟁이였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자신이 모든 걸 책임져야하는 자기 사업이었다.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가 많았지만 김 사장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대부분의 중소기업 사장이 그렇듯 김사장도 다른 길을 갈운명은 안되었던 모양이다. 숙고 끝에 그는 아는 길인 「한 우물」을 선택했다. 『국내 시장에서는 전망이 없지만 해외에는 판로가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성가를 쌓은 뒤 국내 시장을 공략하면 전혀승산이 없는 건 아니다』라는게 김사장의 복안이었다.해외로 나가자는 그의 전략은 일단은 옳았다. 비록 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인 OEM이기는 했지만 회사 설립 3개월만에 처음으로 일본에서 5천개 주문을 받는 매출을 올렸기 때문이다. OEM은 전적으로 바이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불안정하다는 결정적 약점이 있으나 달리 대안도 찾기 힘들었다. 「로만손」이라는 자기 브랜드를 외국바이어들에게 알리고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잡을 때까지는 이 방식을 유지해야만 했다.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우려는 현실로 너무 일찍 다가왔고 대가는혹독했다. 엔화가 급등하자 일본 바이어가 이런저런 무리한 요구를하더니 급기야는 채산성을 내세워 동남아로 수입선을 바꿔버린 것이다. 졸지에 판로가 끊긴 로만손의 5명 전 임직원은 머리를 맞대고 타개책을 논의했다. 결론은 역시「로만손(ROMANSON)」내 상표로해외진출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결과적으로 볼 때회사 창립 1년도 안돼 겪은 이 쓰라림이 사실 몇 년 더 늦게 찾아왔던들 로만손 시계의 성장은 훨씬 뒤로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신혼부부가 가장 선호하는 예물시계’89년 4월 로만손은 고려무역이 중동 두바이에서 개최한 한국물산전에 처음으로 참가, 자체 상표로 1백만 달러의 수출계약을 성사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그 이후로 매년 4~5 차례씩 해외 시계 및 보석관련 전시회에 참여해 브랜드를 알리는 한편 세계시장의 흐름 파악도 게을리 하지않았다. 홍콩 두바이 싱가포르 라고스 파나마 등 세계 상권 요충지에 직접 뛰어들어 일류 상품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제품으로 인식되도록 만들었고 90년 6월에 미국 현지 법인 설립,91년 헝가리 현지법인 설립 등 현지화 작업에도 총력을 기울였다.로만손은 이처럼 해외시장을 공략하면서 크게 두가지 부분에 중점을 뒀다. 하나는 1국 1바이어 엄선 정책으로 해당 바이어에게는 독점 판매권을 주고 광고판촉을 지원하는 한편 목표달성시에는 수출단가인하로 보상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반면 목표에 미달했을 때에는 미련없이 바이어를 교체했다. 이 관리방식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면서 현지 고객의 취향이나 불만사항 등이 정기적으로 입수되는 것은 물론 유수 시계업계의 동향도 파악되는 등 정보교류 체제가 확고히 자리잡았다.또 하나는 디자인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로만손은 이미 수년전부터 시계가 기능보다는 패션산업으로 흐를 것이라고 예측해 일찍 디자인실을 설치 운영해왔으며 지금까지 약 2백여개의 고유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김사장이 어느 정도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는 한달에 보름씩 나가있는 해외 출장시 무역부 직원 외에 반드시 디자이너를 대동하는데서도 엿볼 수 있다. 세계의 디자인 추세에 뒤져서는 안된다는 게 김사장의 확고한 경영관이다.이러한 적극적인 해외공략 결과는 90년 1백만달러 수출탑, 그 2년뒤인 92년에는 5백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는 화려한 열매를 맺는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김사장은 당초 자신에게 약속한대로 「해외에서 더 유명한」이라는 광고 문구를 앞세우고는 당당히 국내로 들어왔다. 현재 내수와 수출 비율은 55대 45로 오히려 국내에서의 매출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최근의 한 전문지 조사에 따르면 신혼부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예물시계는 로만손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조사는 신혼부부만을 대상으로 한데다 대상자도 1백쌍에 불과해 일반화시키는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만손의 「토탈 브랜드」화(시계뿐 아니라핸드백 지갑 안경 등에도 사용되는 상표)를 꿈꾸는 김사장의 장기사업 구상에 힘을 얹어주는 계기가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니 인터뷰 / 김기문 로만손시계 사장▶ 대기업도 시계 산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뒤늦게 적은 자본으로 뛰어들면서 자신이 있었습니까.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 고객 선호도의 변화가 빠른 산업이기 때문에 정책 결정이 느린 대기업에는 오히려 맞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일정기간 동안은 가급적 대기업과의 마찰을 피했습니다. 특히 대리점을 시계업 경험이 없는 업자로 선정하는 등 마케팅면에서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사업과정에서 특히 어려움이 있었던 때라면.걸프전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사실 저희는 안정적인 바이어와 거래하고 있었지만 주위에서는 걸프전 때문에 곧 도산할 업체로 보더군요. 은행에서는 신용장 인수도 안해주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수출선을 다변화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거래국은 많이 늘었습니까.수출국은 30여개국에 이르고 상표 등록 한 나라는 50개국입니다.▶ 경영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무엇입니까.중소기업의 맹점은 계획과 통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저는 무슨일을하든 반드시 단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자료화, 통계화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진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사업은 공부보다 어렵다고 봅니다. 사업하고 싶으면 똑똑한 사람1천명을 이길 정도의 경쟁력을 갖춘 뒤 착수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