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진영은 지난 22년간 세계 축구계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해 온 FIFA회장 아벨란제. 그리고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중남미 일대의 쟁쟁한 FIFA 집행위원들, 세계 2위의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일본의 정·관·재계 인사, 미국 CIA와맞먹는 정보력을 갖췄다는 일본의 대기업들. 한국쪽은 사실상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한사람 정도….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한 한일간의 경쟁은 애당초 결과가 궁금시되는 게임적인 요소는 없었다. 승패는 처음부터 결정되어있는 것이나마찬가지였다.그러나 일본측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벨란제라는 거물을유치 전선의 대리인으로 내세웠다는 것은 대단한 무기임에 틀림없으나 반면 독불장군식 강자에게 흔히 있기 마련인 반발 세력의 강력한 저항 또한 감수해야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세계 축구의 양대 산맥중 하나인 유럽은 그렇지않아도 아벨란제의 지나친 독주에반감을 갖고 있을뿐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오랜 역사적·정서적 배경이 있었다.정몽준 회장은 따라서 개혁세력, 즉 반아벨란제 진영을 결속하는데총력을 기울였다. 그 작전은 막판까지 외줄타기와 같은 아슬아슬한상황으로 치달았지만 최종적으로 아벨란제-일본 진영은 정회장의연합개혁세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결과론이지만 일본측의 작전구도는 결국 후자의 위험부담이 전자의 강력한 화력을 제압하는 상황이 되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패착으로 귀결됐던 것이다.◆ 일본, ‘한국의 현대가 무섭다’오래전부터 재계에 회자되는 우스개 소리로 일본은 한국의 다른어떤 기업도 무서워하지않으나 현대만큼은 두려워한다는 얘기가 있다. 아마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잘 알려져 있지만 건설을 모체로 하는 현대에는 「다소 무모해보이더라도돌관(突貫)한다」라는 기업문화가 깔려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현대가 있게 하는데 결정적 원동력이 된 것은 쉽게 부인할 수 없다.돌다리를 두드려본 뒤에도 건너는데 심사숙고하는 여타 기업과는분명 다른 면이다.정회장의 부친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과거 70년대에 조선소도 채 짓지 않고 외국에서 배를 수주해온 것이 그렇고 80년대초에 아무도 가능하리라고 보지 않았던 올림픽 유치를 극적으로 성사시킨 것도 그렇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지난 대통령선거때 출마했던 것 역시 「현대 다운」 발상이라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조조의 대군과 마주한 장판교의 장비-. 객관적 상황이 한국쪽에절대 열세였음을 감안하면 한일간 2002 월드컵 유치경쟁에 임하는정회장의 입장은 이와 똑 같았다. 그러나 장비는 결국 조조의 대군을 뒤로 후퇴시켰고 정회장은 일본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그렇게볼 때 정회장이 일궈낸 이번 결과는 세계 축구계 판도에 대한 냉정한 수읽기와 더불어 장비 같은 뚝심을 발휘한 소산이라고도 할 수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정회장 역시 틀림없는 「현대맨」이었던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현대의 독특한 기질과 맞붙어 쓴맛을 보곤했던 일본으로서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악몽을 되새길 수밖에 없게된 셈이다.월드컵 유치전선에 뛰어든 이후 정회장의 행보를 보면 이같은 점은더욱 확연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월드컵 유치위원회가 공식 출범한 것은 지난 94년 1월. 그는 이 이후 지난 5월말까지 자신을 제외한 20명 FIFA 집행위원 (개최지 결정 투표위원)들을 만나러 지구를 40바퀴 가까이 돌 정도의 강행군 해외출장을 다녔다. 꼬박 1년1개월을 해외에서 보낸 것이다. 특히 월드컵 유치를 위한 결정적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94년 5월의 FIFA 아시아 지역 부회장 선거때 회원국 거의 전부를 순방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국회의원직의 유지는 개인적 차원을 떠나 유치활동에도 중요하게작용하는 요소이기에 커다란 신경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나 그는지난 4·11총선에서 거의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다. 선거에 즈음한그의 일정만 보더라도 미국 메이저 리그 축구 출범식에 참석했다가8일 귀국, 불과 이틀간의 반짝 표밭갈이, 그리고는 멕시코 북중미축구연맹총회 참석차 선거 결과도 못보고 11일 오후 7시 출국. 이런 식이었다.월드컵 축구 유치전 역시 정보전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놓칠 수 없는 대목. 20명 집행위원국에 주재하는 현대종합상사 지사들은 집행위원들의 각종 행사참석 정보 등을 빠지지않고 보고해왔고 생일 결혼일 등 기념일에는 케이크라든가 꽃 카드 등을 보냈다.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유창한 정회장은 또 이 자료를 기반으로 집행위원들과 접촉하면서 근황을 묻는가 하면 영어로 인사 편지도 보내는 등 끊임없이 친근감이 유지되도록 했다. 반대로 회원국대표가 방한하면 집으로 초청, 부인 김영명씨와 함께 불고기 갈비등 한국 음식을 대접하곤 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가까운 관계」이상의 효과적인 득표 전략은 없기 마련이므로.◆ ‘부친은 올림픽·아들은 월드컵’유치 진기록시종일관 일본을 지원해 한국민들에게 뚜렷이 각인된 아벨란제회장과의 담판도 흥미롭다. 지난 95년 6월 정회장은 개최지 조기 결정을 주장하는 아벨란제 회장에게 그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회장은심판이다. 규정에 정해진 대로 양측이 정당하게 게임을 할 수 있도록만 해달라』고 호소해 관철시켰다. 열세의 장수가 압도적 우위의적장과 협상을 벌여 큰 위기를 넘기는 순간이었다.『2002년 월드컵은 한일 양국 대표팀의 한판 승부로 결정짓는 것이어떠냐』 93년 봄 일본 J리그 개막식에 초청받은 정회장은 축하인사를 요청받고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 자리는 원래 일본이 월드컵 유치를 선언한 뒤 세계 축구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을초청해 세과시를 하기위해 마련한 행사였다. 그는 자신의 기를 꺾으려는 이같은 일본의 저의를 읽고는 뼈있는 반박을 했다. 이 발언이후에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뛰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유치에 실패할 경우 『한판 승부 운운』하는 발언은 게임에서 패배한 자의 생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운명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정확히 3년 뒤 그는 지난 5월31일 FIFA 집행위원회가 끝난뒤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똑 같은 제의를 했다. 그것은 3년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완수한데 따른 뿌듯함의 발로이자 자신감의표출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발언에 코웃음을 날렸던 일본 유치관계자에게 보내는 멋진 빚갚음이었다.이제 정회장은 부친의 올림픽 유치에 이어 아들이 월드컵을 유치하는 진기한 기록을 남기게 됐다. 경제인으로서, 또 체육인으로서 한국에 큰 기여를 한 2대는 아마 달리 짝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