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에서 플랜트제조업체를 운영하는 P사장은 요즘들어 부쩍 늘어난 부도어음 때문에 걱정이다. 지난해초 만해도 부도어음은석달에 한장 있으면 많은 축에 속했다. 그런데 올들서만 벌써 7군데서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났다. 무려 7군데서 상품대금을 떼인 셈이다. P사장은 늘 부도를 염두에 두고 자금을 운영하기 때문에 연쇄부도의 구렁에 빠져들지는 않았지만 부도어음이 계속 이어질까걱정이다. 이미 받아놓은 어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비상장기업의 어음은 금융기관에선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아 선이자를 물고 현금으로 바꿀 수 없다. 이전같으면 사채업자들을 통해월 5%의 이자를 물고라도 할인할 수 있었지만 이젠 사채업자들까지도 비상장기업의 어음엔 등을 돌렸다.◆ 금융권 자금 사용 ‘하늘의 별따기’올들어 어음부도율은 82년 5월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후 최고치를매달 경신하고 있다. 장기불황의 여파에다 한보계열사의 부도어음이 계속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삼미나 한보의 하청업체는물론 이들 기업과 아무 관련이 없는 중소기업들까지 연쇄적으로 넘어지고 있다.지난달 28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어음부도율 동향」에 따르면 전국 어음부도율은 0.24%로 전월(0.21%)보다 0.03%포인트 올랐다. 서울지역 어음부도율도 전월(0.16%)보다 0.02%포인트 높아진 0.18%를기록했다. 지방 어음부도율도 0.53%로 전월(0.49%)보다 0.04%포인트 올랐다. 전국 어음부도율은 지난해 9월(0.12%)부터 5개월째 연속 상승세를 나타냈다.어음부도뿐 아니라 회사를 팔겠다는 요청도 크게 늘고 있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일부 중견그룹의 경우 대그룹을 찾아다니며 직접 인수합병을 요청하고 있다. M&A중개기관에도 매도신청이 늘어 50건이상의 매물을 갖고 있는 곳이 많다. 코미트M&A의 경우 올들어서만기업매물을 50여건 이상 확보하고 있고 아시아M&A도 사정은 비슷하다. 기업은행은 80건의 매물을 신청받은 상태다.기업을 팔겠다는 요청이 늘고 있는 이유 역시 어음부도증가와 맥을같이한다. 오랜 불황에다 한보와 삼미그룹의 부도까지 겹쳐 자금사정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건설업 상호신용금고 중소부품업체 매물이 부쩍 늘고 있다.기업의 부도나 인수합병 자체는 시장경제에서 자연스런 현상일 수있다. 호황을 누릴 때 불황에 대비해 경쟁력을 기르지 못한 기업은불황을 통해 정리되는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이기 때문이다. 부실한 기업의 도산으로 경쟁력이 없는 한계기업이 쓰러져야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좀더 유리한 경영환경의 이점을 누리며 수익을 높여갈 수 있다.80년대의 3저호황에 의한 영업이윤을 경쟁력의 기반이 되는 핵심적인 기술을 확보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비생산적인 부동산투기 등에만 활용한 기업들이 정리되는건 시장경제원리가 제대로 돌아가고있음을 뜻한다. 이 기간에 투기목적으로 비업무용 부동산 사들이기에 열중한 대기업들은 부동산을 은행담보용으로 사용했다. 막강한담보력을 바탕으로 1억원이 아쉬운 중소기업들을 제치고 은행돈을독식한 대기업들의 부채는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어음부도율 최고치 경신 행진그러나 95년 이후 불황이 닥치면서 은행에서 들여온 차입금은 회사운영에 커다란 부담이 됐다. 수출주력품목인 반도체 등의 국제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엔화절하로 가격경쟁력이 하락하면서 곧바로매출신장세가 둔화되는 등 수익성 재무구조 생산성 등 기업의 모든경영지표가 악화됐다.한국은행이 지난해 11월 조사한 국내제조업체 상반기 경영분석 결과에 의하면 매출액증가율은 95년 22.8%의 반도 안되는 11.3%에 머물렀다. 매출액 경상이익률 역시 95년 상반기 4.2%에 비해 크게 떨어진 1.8%에 그쳤다.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엄청난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기업들은 결국 차례로 쓰러질 수밖에 없다.대기업들의 경기침체에 따른 실적악화는 법인세 수입이 급격히 준데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12월결산 상장법인 4백93개사가 96년도에납부한 법인세는 95년에 비해 29.7%(8천8백70억원)나 준 2조1천9억원에 그쳤다.(증권거래소 조사) 이때문에 지난달에는 법인세 신고를 앞두고 국세청과 기업들간에 세액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문제는 대기업 부실화에 따른 중소기업의 연쇄부도사태다. 금융권의 자금을 사용하는게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중소기업은 늘 자금난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부도어음에 물리기라도 하면운영자금의 부족으로 연결되고 결국 자금결제를 제때 못하게 된다.게다가 은행들은 자금운용을 보수화 단기화하고 있어 우량기업이아니면 신규여신을 취급하기는 커녕 기존여신마저 회수하고 있다.멀쩡한 기업이 일시적으로 자금을 유통하지 못해 도산하고 마는 것이다. 내일 받을 돈이 1억원이라도 당장 막아야 할 3천만원이 없으면 부도를 낼수밖에 없다. 장부상으로는 분명히 흑자를 기록하고있는데도 갑자기 부도를 내고 회사가 공중분해되고 만다.이런 우려는 곳곳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최대의 문구업체인 마이크로코리아사는 흑자도산한 대표적인 예이다.이 회사는 지난 2월1일 서울은행 용산지점에 돌아온 15억6천여만원의 어음을 막지 못한데 이어 이날 같은 지점에 돌아온 22억 5천만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 처리됐다. 우량중소기업으로 알려진 이 회사가 흑자도산한 것은 한보부도사태후 제2금융권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전면 중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출거래를 주로하던 할부금융사들이 자금지원을 기피해 일시적인 자금난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최근 부도를 내고 문을 닫는 중소기업 가운데 거의 절반은 장부상흑자를 기록하는 기업들이라는게 관계자들의 평가다. 시중 유동성은 풍부한데도 돈은 은행권 안에서만 맴돈게 주된 원인이다. 한보철강에 데인 은행들은 우량기업을 제외한 기업대출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우량은행이 보증한 회사채매입도 기피할 정도다. 이에따라 시중 실세금리는 치솟고 있으며 돈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아무리 영업실적이 우수해도 연쇄부도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경기도 김포에서 가구업체를 꾸려가는 D사장의 경우 2천만원상당의담보여력이 있는데도 1천2백만원짜리 어음을 거래은행에서 할인하지 못했다. D사장은 사채시장을 찾았지만 월10%의 이자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때문에 『어음제도를 없애거나 어음발행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 영등포에서열처리업을 하는 Y사장은『어음제도란게 멀쩡한 사람을 사기꾼으로전락시킨다』며 『어음이 돈 떼어먹고 도망가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을 어렵게 하는데는 대기업들도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D그룹의 경우 결제금액이 2백만원만 넘어도 어음으로지급하는 등 이들 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 관계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