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하는 용에서 추락한 종이 호랑이로」.최근 한국의 위치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승승장구하던 모습은 간데 없고 이제는 세계 곳곳을 돌며 손을벌여야만 하는 처지로 몰락했다. 이 신세 하락의 와중에 궁지로 몰리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재벌」이다. 재벌은 한국전쟁의 잿더미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주역」에서 경제위기의 최대 「주범」으로 급격히 전락했다. 특히 재벌과 함께 양대 위기 주범의하나로 꼽히던 YS 정권이 물러나면서 「재벌」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고 있다. 「재벌 개혁」이란 공공연한 비판과 함께 「고통분담」을 거부하는 공룡」으로까지 지목되고 있다. 재벌에 대한 해외의시각은 더욱 냉소적이다.「엄청난 부채를 짊어지고 확장일변도로 과도하게 다각화된 재벌들이 한국이 IMF에 손을 벌리게된 근본 원인」(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 「재벌은 하나의 사이비 종교, 총수는 황제」(프랑스 시사주간 누벨 옵세르바퇴르), 「한국의 부는 빚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미국 시사 주간 뉴스위크)」등. 한국 경제에 대한 해외 언론의비판 리스트는 끝이 없다.한 때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 모델로 연구 대상이 됐던 「한국적경영」은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었단 말인가. 해외 언론의 반응은 한마디로 「그렇다」는 것이다. 「한 때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면서 후발 개도국의 성장 모델이 됐던 한국식 경영행태는더이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게 서방 해외 언론의 지적.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 소장도 『국내에 산업 기반조차 없을 때 대형설비 투자를 주도하며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재벌의 공로는 분명 인정해줘야 한다』면서도 『설비 투자하는 과정에서 차입을 많이해 팽창은 빨랐지만 너무 불안정했던 것도 사실』이라고한국적 경영의 맹점을 인정했다. 한마디로 성장 위주의 경영을 하다보니 차입금 의존도가 너무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국내기업들이 막무가내로 돈을 빌려다가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데는정부 정책의 「잘못」도 한몫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현대경제사회연구원의 임동춘 경영전략본부 경영분석실장은 『우리기업들이 차입경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경제정책의 기조가 70년대 이후 계속 성장 위주의 수출 드라이브로 흐르다보니만성적으로 자금 초과 수요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제성장이 막 시작됐던 70년대에 국내에 증권시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업이 사업 자금을 얻기 위해서는 은행 차입금과 일부 사채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문제는 은행이 기업을 객관적으로 심사를 해서 돈을 빌려줬던 것이아니라 정치권 등 외압의 논리에 휘둘렸다는 점이다. 『우리 기업을 세계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크게 키우는 한편 덩치가커진 기업이 정권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은행 대출금을 통해 기업을조정하는게 정치권의 주요한 정책이었다.』(대우증권 강창희 상무)『자금을 누가 먼저 얻느냐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정경유착이 형성돼왔다』(임실장 현대경제사회연구원)는 지적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국제그룹 해체 사건이라든가지난해 한보그룹의 부도사태는 경제에 대한 정치권의 입김이 공공연히 자행돼 왔다는 대표적인 증거로 꼽힌다. 차입경영을 위한 정경유착이 기업 경영의 불투명성으로 연결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존 경영 틀 벗어버리라”정경유착으로 얼룩진 차입경영과 경영의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세계 11대 경제대국의 하나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재벌의 거대한 덩치때문」이라고 말한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한다고 할 때 외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삼성자동차가 아니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덩치 큰 삼성그룹』(조영빈 삼성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이라는 지적이다. 대우증권 강상무도 『한국과 대만의 경제 수준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대만보다 한국의 경제가 두드러져 보였던 이유는 세계적인 기업들과 비슷한 덩치의 그룹들이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주요 기간산업에서 선전해 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대만의 경우 대기업은거의 없고 가족 중심으로 운영되는 직원 열대여섯명의 중소기업이대부분이다. 우리 경제가 몇몇 공룡 위주로 구성돼 있다면 대만은수만의 개미 군단으로 이뤄진 꼴이다.지금까지의 세계 경영환경은 한국식의 공룡에게 유리했다. 그러나이제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작은 거인」에게 더 유리하다는게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designtimesp=7608>의 분석이다. 아시아 전체의 금융 위기 속에서 그나마 대만이 「IMF한파의 무풍지대」(이코노미스트 98년1월초)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현재의 경제 상황에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효율성면에서 대만의 개미군단이 국내 기업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원의 조연구원도 『고도 성장기의 성공 경험에 매몰돼 세상 흐름에 둔감하게 반응, 경영환경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 한국적 경영의 좌초 원인』이라고 진단을 내린다.이제 성장의 밑거름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 극복의 걸림돌로까지 작용하고 있는 「한국적 경영」은 이래저래 궤도수정이 불가피하게됐다.IMF(국제통화기금)도 근본적으로 기존「한국적 경영」의 틀을 벗어버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IMF가 요구하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는 M&A(기업인수합병)에 대한 규제 완화, 국제적인 회계기준에 따른 상장회사들의 재무제표 작성, 상장회사에대한 독립된 외부 감사인의 감사, 결합제무제표 작성, 정리해고 제한 규정의 완화 등으로 요약된다. LG경제연구원의 이원흠 경영실장은 『한마디로 기업환경을 시장원리가 지배하도록 하라는 것』이라고 요약한다.내용이 어떻든간에 『세계 경영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글로벌스 탠더드에 따를 수밖에 없다.』(김동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약자의 입장으로서 선택권조차 없다는 말이다.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야한다는 장기적인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속도와 적용의 폭을 어느 정도로 조절할 것인가는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삼성경제연구원 조연구원은 『경영을 어느 한 시점에서정적으로 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금물』이라며 『경영에는 어떤흐름이 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 따라 가장 적합하고 강력한 것을 자신의 몸에 맞게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신바람주의」로 표현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감한 추진력 등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이끌어왔던 한국적 경영의장점들을 점검, 글로벌 스탠더드에 접목해서 신한국적 경영을 창출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