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6년 세계 정치경제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세계경제포럼의 연례행사인 다보스회의에 모였을 때 이들이 토론한 주제는 「세계화를 계속 추진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갖가지 경제전망을무색하게 한 아시아 지역의 위기상황 아래에서 2년이 지난 1월 말이들이 다시 모였을 때의 주제는 당연히 「경제적 취약성을 어떻게관리할 것인가」였다.지난 6개월 동안 벌어진 일들은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종잡을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기적적이라고 여겨져 오던 나라들의 경제가 갑작스레 수렁에 빠진 것은 「자본은 국경에 구애받지않고 자유롭게 흐르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일반적인 지식에반하는 일이었다.그동안 개도국 정부들은 번영을 위해서는 금융을 자유화해야만 한다는 지적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외국 투자자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거나 국내자본의 해외유출을 방해하지 말고 문호를 개방하라는소리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더욱 빨리 성장하는데 필요한국제자본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멕시코와 한국은OECD에 가입하겠다고 했을 때 자본시장을 더 열라는 압력을 받았다.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자본이 국제적으로 흘러 다니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사실 아시아지역 자체가 최근까지만 해도 이런 인식이 타당함을 확인시켜 주는 곳이었다. 90년대 들어 아시아 국가들은 자본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면서거대한 외국자본의 유입이 이뤄지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외자유입량이 GDP의 5∼10%에 달했고 이는 곧바로 고속성장과연결됐다.(도표참조) 그러나 뒤이어 경제파탄이 초래되자 자본의자유로운 흐름이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인식이팽배해졌다.이론적으로는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투자자는 투자수익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다른 투자처를 물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금융시장은 교과서처럼 단순하지 않다. 투자자들의 심리는 극단적인 낙관과 비관을 오가는 등 변덕스럽다. 또 일이 잘못되더라도 중앙은행이나 IMF가 구제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극단적인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는 투자자들의 모험심리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결국 금융시장에서 자본이 완전히합리적으로 수급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흐름에 약간의 규제가 필요하다”지난해 9월 모하메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세계자본시장을사나운 맹수들이 들끓는 정글에 비유했다. 이런 종류의 언사는 정책실패를 호도하기 위해 흔히 쓰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진지한경제학자들은 자본흐름에 약간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고 있다. 태국에서 활동하는 필리핀출신 경제학자 월든 벨로는 흉포하고 점점 무분별해지는 자본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이런 주장들은 지난 몇년동안 심심찮게 논의됐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이 고안한 한 방법은 외환거래에 약간의 세금을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장기적 투자에는 별 효과를 미치지 않는데비해 단기적 투기자들에게는 더 비용을 치르도록 만드는 방법이다.그러나 이 「토빈세」는 피해가기가 쉽다. 투자자들이 세금이 안붙는 나라로 거래를 옮겨버리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방법은 통화를 가장 많이 내다파는 주체가 투기꾼이 아니라 달러빚을 필사적으로 피해가거나 빚을 상환하려고 애쓰는 국내의 기업들인 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자본유입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전문가들 중에는 단기 외환차입을 제한하는 방법이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 IMF와 세계은행도 이런 방법을 실행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해 왔다. 지난 82년 지금의 동아시아와 비슷한 금융위기를 겪은칠레는 이 방법을 이용한 표본이라고 할수 있다. 그때 이후 칠레는자유시장의 확고한 지지자임을 천명하면서도 단기적 외국자본 유입을 억제할 방법을 여러 가지로 찾던 중 모든 해외차입금과 외국에서 들어온 은행예금에는 세금이 부과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방법을썼다. 기업이 외국에서 돈을 빌릴 때 대부금의 30%는 1년동안 중앙은행의 무이자 계좌에 의무적으로 예치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칠레, 자본 통제로 탄탄한 경제성장칠레는 지난 수십년간 대부분의 다른 개도국들보다 탄탄한 경제성장을 누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흐름에 대한 통제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몇몇 연구는 통제가 얼마동안은 자본유입을 전체적으로 감소시켰고 단기투자보다는 장기투자를 활성화시켰다는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통제의 효과는 생각한 것보다 적을 것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다. 칠레 기업들이 외국은행들로부터 돈을적게 빌리더라도 다른 단기유입이 늘어나서 전체 단기 자본유입은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칠레의 경험은 이상적으로는 바람직하지만 자본통제를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각국의 사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본 움직임이 불안정한 정도는 한 나라 금융제도의 견실성과 경제정책의타당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결국 이 말은 정부가 문제를 해결할능력이 있느냐에 따라 사정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자본유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다.첫째,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외국자본에 문호를 개방하기 전에 국내 금융제도를 자유화해야 한다고 한다. 대체로 동아시아 국가들은이렇게 하는데 실패했다. 금리상한선, 정부의 대출지시, 은행과 채무자간의 내부관계 등으로 인해 자본흐름이 수익성보다는 결정권자의 입맛대로 움직였다. 외국에서 차입된 자본도 같은 방향으로 밀어넣어졌다.둘째, 금융자유화에는 은행에 대한 엄격한 단속과 감시가 요구된다. 은행이 도산해 자본흐름의 역전이나 금리의 급격한 상승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개방적인 금융시장을 가진 홍콩이 지금까지 다른 많은 인접국보다 곤경을 더 잘 헤쳐나온 한 이유도 탄탄한 은행제도에 있다.셋째, 경제정책의 전제조건은 환율의 탄력성이다. 자본이동은 자유화시키면서도 고정환율을 시행한다면 홍콩처럼 통화위원회의 통제를 통해 모든 경화가 달러의 지지를 받는 경우가 아닐 경우에는 위험한 일이다. 고정환율제는 높은 금리로 인해 통화가치가 높아지더라도 중앙은행이 경제과열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 뿐 아니라 외국의 금리가 국내보다 낮을 때 너무 많은 외화가들어오는 것을 방치한다.마지막으로 금융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려면 믿을 만한 정보가필요하다는 점이다. 만약 채권자들이 한국 민간부문의 채무상태와태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더라면 더 일찍 손을 뗐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이상의 네가지 생각은 어느 것도 금융시장의 문호를 열지 말라는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융자유화에는 위험이 따른다. 취약한 금융시스템을 보유한 나라가 외국자본에 문을 여는데는 각별한주의가 필요하다. 중국은 인접국의 경험에서 배워 금융시스템 개방과 통화를 완전태환으로 만드는 과정을 느리게 진행시키고 있다.자본흐름에 대한 규제만이 아시아 위기의 재연을 피해갈 수 있다는생각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이보다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이 가져다 주는 이익을 누릴 수 있게끔 각국이국내 금융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