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물' 50년, 명품 일궈내이탈리아가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것은 대를 이어가며 한 우물을 파는 전문 중소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세계시장을 제패하고 있는 가구분야만 해도 3만여개 업체중 종업원이 1백명을 넘는 업체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이 가내공업수준의 업체들이다. 하지만 수십년 수백년을 이어온 기술력과 노하우는 넘보기 힘들다.한국에도 요즘은 대를 이어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생겨나고 있다.하지만 대를 이어 한가지 품목만을 생산하는 업체는 아주 드물다.신진금고제작소는 그런 드문 업체중 하나다.은행에 가면 벽금고가 있다. 여기엔 현찰과 수표 귀금속 등이 보관된다. 스테인리스 표면에 문짝 무게만 2t에 달하는 이 금고는 안전의 심볼이기도 하다. 금융기관용 벽금고가 바로 신진금고제작소의대표적인 생산품목이다. 신진은 이 분야에서 몇가지 기록을 세우고있다.우선 역사가 오래됐다. 광복직후인 45년 10월에 문을 열어 53년동안 한 우물을 파왔다.시장점유율도 가장 높다. 국내에 보급된 금융기관용 벽금고중 절반은 신진에서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은행에서 투신사 새마을금고우체국 전화국 증권예탁원에 이르기까지 이 회사의 제품이 설치돼있다. 19개에 이르는 금융기관용 벽금고업체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보급한 것이다.◆ 금융기관 벽금고중 절반 장악가장 자랑스런 것은 납품한 금고 가운데 문이 열려 도둑을 맞은 경우가 한번도 없다는 것. 이 회사가 만들어 공급하는 것은 벽금고지만 정확히는 벽금고의 문짝(금고비)이다. 나머지는 벽으로 둘러싸여 자연스레 전체 금고를 형성한다. 한데 도둑이 벽을 뚫으면 뚫었지 문을 열고 가져간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는게 회사측의 설명이다. 그만큼 신뢰성이 높고 이는 바로 회사의 자산이다.신진을 이끄는 사람은 이재원사장(49). 경영 2선으로 물러난 창업주 이준용회장의 아들이다.60년대 야구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사장을 기억할지 모른다. 학창시절에 날리는 야구선수였다. 인천고와 성균관대 상대를 나온 그는대학졸업 때까지 야구선수로 활약했다. 호타준족을 지녀 공격땐 주로 1번과 2번타자를 했고 수비땐 유격수를 맡았다. 대한야구협회총무이사를 거쳐 현재 섭외이사를 맡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인연때문.야구를 사랑했지만 대학졸업과 함께 일단 인연을 끊어야 했다.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신진으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75년 서울 응봉동 공장의 직원으로 입사한 뒤 글러브 대신 용접기를 들고 철판앞에 앉았다. 철판을 자르고 구부린 뒤 용접하고 조립하는 일들을 배웠다. 부친은 경영을 이어받으려면 밑바닥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생산현장에 근무시켰다. 이 일을 통해 금고의 재질구조 안전장치 등에 관해 섭렵했다.당시 신진은 자체 생산을 하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업체 제품의 수입판매도 병행했는데 10년동안 이들 제품의 애프터서비스를 수행하며 노하우도 속속들이 파악했다.15년 동안 생산 개발 영업 분야를 두루 거친뒤 90년 사장에 취임하자 다양한 금고를 출시, 제 2의 도약에 나섰다. 전동식 슬라이딩 금고를 개발, 발명특허를 얻었고 지문인식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대여금고, 컴퓨터대여금고 등을 잇따라 개발, 히트 쳤다.◆ 중국수출, 올해 30만달러 무난할 듯전동식 슬라이딩 금고는 금고문이 옆으로 열리고 닫히는 제품. 여닫이 금고와는 달리 공간을 절약할 수 있다. 특히 정전시엔 수동으로 작동되는데 중량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인다.지문식 대여금고는 열쇠나 비밀번호대신 지문을 이용해 문을 여닫는 시스템. 만인부동 평생불변의 특성을 지닌 지문을 이용한 첨단금고다. 컴퓨터 대여금고는 고객이 직접 컴퓨터를 통해 문을 열고닫는 제품이다.다양한 첨단제품을 선보이자 금융기관용 금고시장을 석권하던 일본과 미국제품이 하나둘씩 철수, 이제는 거의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96년에는 시화공단내 대지 3천평 건평 1천4백평 규모의 번듯한 건물을 지어 공장을 이전했다. 이 공장은 컴퓨터수치제어(CNC)밀링머신 등 첨단생산장비와 컴퓨터지원설계(CAD)장비 등을 갖췄다. 1천분의 1mm의 오차를 다투는 정밀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설비들이다.「최고(最古)의 기업답게 최고(最高)의 제품을 만든다」는게 이사장의 경영철학. 이를 위해 초정밀기술과 장인정신을 결합시킨다. 설계와 제작에서부터 한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마지막 검사과정에서 발견한 오차 있는 제품은 가차없이 처음 공정으로 되돌려 보낸다.내수시장에서 기반을 다진 신진은 이제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리고있다. 때마침 불어닥친 IMF체제는 내수시장에 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올해초 수출팀을 신설하고 이들과 함께 중국에 출장, 첫 오더를 따왔다. 금액은 5만달러로 미미하지만 첫 주문은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올해 30만달러는 무난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1백만달러 이상을 수출할 계획이다. 주요 타깃은 중국. 시장이 큰데다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금고는 얼핏 보기엔 간단한 제품입니다. 하지만 방범과 내화기능견고성 안전성 등 갖춰야 할 요건이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결코 하루아침에 정상에 올라설 수 있는 분야는 아닙니다.』그는 신진제품이 성능과 기능면에선 이미 정상급에 올라섰다고 자부한다. 다만 디자인면에서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고 평한다.금고는 이제 단순한 안전설비에서 한걸음 나아가 인테리어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어서이다.『반세기 이상 한 우물을 판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업다각화에 대한 유혹도 여러번 있었고 돈을 많이 벌 때는 기술개발 대신 부동산투자에 대한 유혹도 받았지요.』신진이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종업원 수 50명, 작년매출 60억원의 중소기업에 머물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전문기업이라는 한계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기업이라는 위험부담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해당분야에서 정상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스포츠맨 특유의승부근성 때문인지도 모른다.이사장은 21세기에도 신진을 금고전문업체로 끌고갈 계획이다. 또세계시장에서 멋진 승부를 펼쳐 보일 생각이다. 해외시장에서 분투하는 신진의 모습에 금고업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