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에에 대한 사랑과 지식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선구자」 「알로에 사업을 인류에 대한 헌신으로 생각하는 기인」.(주)김정문알로에의 김정문회장(71)은 기업인이다. 크다고 할수는 없어도 그래도 2백2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연간 2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의 어엿한 최고경영자다.그러나 김회장을 알고 있거나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중 그에 대해기업인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다. 오히려 앞에 표현했듯이 「알로에만을 생각하고 알로에만을 위해 사는 전도사」의모습을 그리는 사람들이 압도적이다.알로에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알로에의 효능, 종류 등은 잘몰라도 김회장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숱하게 많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김회장의 인생역정에서 알로에와 함께 지낸 기간은3분의 1이 채 못된다.그가 류머티즘 관절염 등 온갖 불치의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인75년에야 비로소 「알로에 건강법」이라는 일본책자 한권을 통해알로에의 존재를 알게 됐으니 올해가 만 23년째 되는 셈이다.하지만 알로에를 알고 난후 김회장의 인생은 그 이전까지와1백80도 달라졌다. 김회장은 청소년시절부터 보통사람들보다 훨씬굴곡이 심한 인생을 살아왔다.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폐결핵, 위궤양 등 온갖 중병의 덫에 걸리면서 교육자가 되려는 꿈을 중도에접어야 했다. 만 14세부터 병고와의 사투를 시작한 그는 그뒤 수산학교, 신학교를 전전했지만 마음 붙일 곳을 찾지못했다. 6·25전란중에는 부산의 동아대에 다니면서 기독학생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젊은 나이에 서적 수입, 노트사업 등에 손을 대 큰 돈을 벌기도했다.노트사업 등으로 모은 돈으로 생명보험회사를 인수했다가 영업부진으로 이를 고스란히 날리기도 했으며 60년대부터는 원예업에 인생승부를 걸기도 했다.그러나 사업에 관한한 젊은 시절의 김회장은 행운의 여신과 거리가멀었다.카네이션 재배로 큰돈을 벌수 있게 됐을 때 때마침 불어닥친 4·19등의 사회혼란은 김회장의 경제적 성공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악전고투 끝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바나나, 파인애플 등의 열대과일 온실재배에 성공했지만 이 역시 구상무역으로 들어온 외국산 저가 바나나 등에 밀려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거듭된 사업실패로 위장병, 중증변비와 류머티즘 관절염 등에 신경정신질환까지 얻게된 그는 지난 75년 부산 복음병원의 고 장기려박사로부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기도 했다.유난히 굴곡이 심했던 자신의 인생에 지쳐버린 그가 택한 길은 두번의 자살.그렇지만 그때마다 그는 새 운명을 부여받았고 결국 국민학교 동창생 한명으로부터 전해들은 알로에 이야기는 그의 중년 이후를 알로에 인생으로 바꾸어 놓았다.부산 동래의 한독원예고등학교 표본실에서 알로에사포나리아라는품종을 찾아낸 후 알로에를 복용하면서 무려 33년만에 병마의 질곡을 벗어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알로에 전도사로 변신했다.◆ 기업인이기 보다 장인정신으로 승부알로에를 키워 내다 팔고자 해도 처음에는 효능을 믿어주는 사람이없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지만 때마침 매스컴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국적으로 서서히 알로에 붐이 일기 시작했다.자신감을 얻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79년 종로의 기독교회관 안에「한국알로에의 집」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대규모로 확장하기 시작했다.사업확대를 위해 은행돈도 빌려쓰고 농장도 늘리면서 전국 주요도시에 40여개의 대리점을 개설했다. 순풍에 돛 단듯이 사업이 커가고 김회장을 찾는 사람이 앞다투어 주위에 몰려들면서 모처럼 사업하는 보람을 맛보는듯 했다.하지만 그의 불운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알로에의 인기가높아지자 시중에는 불량, 저질알로에가 무수히 나돌기 시작했다.일확천금, 한탕을 노리고 뛰어든 악덕업자들이 유통과정에서 품질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제품을 마구 판매했고 소비자들의 불신이높아가는 한켠에서 업자들은 죽기살기 식의 덤핑경쟁을 벌였다.알로에 업계를 덮친 이전투구 싸움은 김회장에게도 치유키 어려운상처를 남겼고 그에게는 또한번의 실패기록이 추가됐다. 82년말 알로에농장도 빚으로 남에게 넘어갔고 그는 무일푼으로 유랑생활에나섰다.그가 알로에에 대한 신념을 꺾지 못하고 알로에업계로 다시 돌아온것은 83년10월. 그는 친누님이 마련해준 5백만원을 종자돈으로 마지막 승부를 걸었다.다시 한번 매스컴을 상대로 눈물어린 설득과 홍보활동을 끈덕지게펼쳤고 대다수 악덕업체가 도태된후 매스컴도 다시 그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KBS TV는 그에게 알로에 건강법을 전파할 출연기회를 주었다. 기독교방송 역시 알로에 건강프로그램을 신설해 주었으며 이에 용기를되찾은 그는 84년부터 일반대중을 상대로한 강연을 다시 시작했다.상승가도를 탄 사업 역시 쑥쑥 신장을 거듭, 알로에연구소는 90년현재의(주)김정문알로에로 전환됐고 이를 바탕으로 푸른화장품,건도식품 등의 자회사도 생겨났다.알로에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이면서 동업계의 간판경영인으로 불리는 김회장이지만 알로에 하나에 20년 이상의 세월을 매달려 산 그에게는 이제 기업인이라기보다 장인으로서의 면모가 더 진하게 배어있다.김회장은 알로에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소비자들도 그러한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단언한다.알로에는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인체기능의 균형을 잡는데 도움을 주어 자연적인 치유가 가능토록 해주는 것이라는게 그의 지론이다.그러면서도 그는 더많은 사람들이 알로에와 더불어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강연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를 가리지 않고 찾아간다.지금까지 한 대중강연 횟수만도 줄잡아1천2백여회에 이르는 것으로추정하고 있으며 틈만 나면 밤이건 새벽이건 책을 쓰기 위해 펜을잡고 원고지를 메워간다.80년10월 「경이의 약초 알로에」를 펴낸후 작년 8월 「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출간하기까지 펴낸 책은 모두 20권. 모두가 알로에와관련된 책이며 지금도 강연, 기고문 등을 모아 또 한권의 책을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다.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바른글」을 많이 쓰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함께 옳고 바른 사회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한다는 의미로 경실련, 바른경제동인회, 환경운동연합협의회, 건강을 위한 시민의 모임등 수많은시민운동단체에 기업경영에서 얻은 힘을 보태고 있다.최근의 급속한 경기악화로 건강보조 식품업계가 한결같이 매출감소의 홍역을 앓고 있지만 알로에와 관련된 하나의 꿈을 버리지 않고있다.알로에 학교를 세울 때까지, 전세계에 알로에의 진가를 알릴 때까지는 결코 쓰러지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