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턴의 파크애비뉴 49가에 있는 베어 스턴즈증권 본점 빌딩. 매일 아침 9시면 이곳의 2층 트레이딩 룸에 백발의 정정한 노인이 모습을 나타낸다. 최근 90회 생일을 맞은 존 슬레이드 명예회장 겸 영업담당 전무(Senior Managing Director)다. 트레이딩 룸의한켠에 줄지어 있는 책상들 중의 하나가 그의 일자리다.옆자리의 젊은 직원들과 다름없이 고객들로부터 주식 거래 주문을받고, 투자상담에 응하는 것 등이 그의 일과다. J P 모건, 메릴린치, 골드먼 삭스 등과 어깨를 겨루는 미국 5대 증권 회사의 명예회장이고 전무라지만 응접세트 조차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한국 나이로 91세인 그에게 「격식」이니 「의전」이니 하는 말은 의미가없어 보인다. 그에겐 「일」이 곧 최상의 의전이다.월가 최고의 「스타」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이 회사의 앨런 에이스 그린버그 회장(70)도 트레이딩 룸에 나오면 슬레이드 옹의 「마이 보이(My Boy)」가 돼 버린다. 슬레이드 옹이 이 회사의 국제부를 설립해 초대부장을 맡고 있던 49년 국제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20대 청년이 오늘의 그린버그 회장이다. 이런 슬레이드 옹에게 월가의 많은 「프로 투자가」들이 투자상담을 요청해 오는 것은 당연하다.그가 매주 한번씩 손수 펴내는 25쪽 짜리 정보지 <존가라사대(John Speaking) designtimesp=7918>는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정보전쟁이 벌어지고, 돌아다니는 정보지 만도 수백 종이 넘는다는 월가에서 2만명이 넘는 독자를 갖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리얼타임으로 각종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요즘이지만, 한 주일의 주요 금융 정보를깔끔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존 가라사대 designtimesp=7919>는 월가에서 최고의 「인기 품목」가운데 하나다.매일 새벽 5시 30분에 어김없이 일어나서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들과 주요 정간물을 섭렵하고, CNN 금융채널 등을 시청하면서 메모한것들에 자신의 「감(感)」을 덧칠해 만든 결정체가 <존가라사대 designtimesp=7922>이다. 이 정보지는 특히 월가의 최고 경영자들이 어떤 책들을 읽고 있는가를 비롯, 「프로 투자가」들이 사들이고 있는 주식 종목들도 소개하고 있어 인기를 더하고 있다.슬레이드 옹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많다. 그 중에서도 「월가의살아있는 역사」 「영원한 증권맨」등은 그의 이력을 잘 설명해주는 수식어다. 190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계 부동산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월가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36년 3월26일. 히틀러 정권의 유태인 탄압을 피해 「한스 슐레징거」라는본명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주한 바로 다음날 입사한 회사가 바로베어 스턴즈다.주급(週給) 15달러를 받고 증권회사 간에 주고받는 거래 전표를 배달하는 일이 그의 첫 임무였다. 타고난 성실성으로 금세 두각을 나타낸 그에게 월가의 많은 금융기관들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뒤따랐지만 그는 한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한 우물」인 베어 스턴즈내에서조차 영업 일선을 떠나본 적이 없다.타고난 낙천주의자를 자임하는 그에게 요즘 60년의 나이를 뛰어 넘는 한국인 친구가 생겼다. 맨해턴을 산책하던 도중 우연히 사귀게된 현대증권 뉴욕 법인의 찰스 김 과장(30)은 그가 자주 만나는 「점심 친구」의 하나다. 그를 통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얘기를듣는 것도 재미있고, 내친 김에 「잠재성 높은 한국 증권시장」에대한 투자도 본격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김 과장을 비롯한 증권계「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증권 투자의 4가지 경험칙」은 일반 투자자들이 특히 귀담아들을 만 한 것으로 정평을 받고 있다.그가 강조하는 수칙 제1조는 「돈을 불리는 데는 주식 투자가 최고」라는 것이다. 인플레 등을 감안하면 돈의 가치는 해마다 떨어지며, 은행 등의 예금 이자 역시 돈의 가치 하락을 보상할 만큼 충분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반면 단기적인 부침이있을지는 몰라도 역사적으로 주가는 계속 상승 곡선을 그려 왔다는것이다.제2조는 「주식 투자는 연령에 따라 차별적으로---젊은 투자자라면공격적인 투자를 주저하지 말라」는 것. 예컨대 30대의 경우 공인된 우량주를 사는 것은 「애늙은이 같은 짓」이라는게 그의 생각이다. 우량주는 누구나 사기를 원하는 것이고, 따라서 주가가 크게오를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얘기다.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성장성이 큰 회사를 골라내고, 이들 주식에 집중 투자해야 단기간에2~3배 이상의 큰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투자에는리스크가 따르고, 따라서 밤잠을 설쳐야 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이므로 50대쯤 되면 우량주를 중심으로 주식에 투자하거나, 채권 쪽에좀 더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제3조는 「스스로의 책임 아래 투자 종목을 결정하라」는 것이다.증권회사 직원 등의 조언은 단순히 「참고」에 그치라는 얘기다.안전한 투자 방법은 우선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주식부터 사는 것이다. 이런 회사는 성장 가능성이높기 때문이다.제4조는 「한번 매입한 주식은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하라」는 것이다. 잦은 교체 매매를 하는 것이 당장은 좋아 보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장기 보유를 당하지 못하더라는 것이 그의 경험칙. 단 예외는있다. 주식시장이 전반적으로 활황을 보이고 있음에도 유독 자신이사들인 종목만큼은 약세를 거듭, 매수 당시보다 15% 이상 떨어졌을경우에는 지체없이 매각하고 다른 종목을 찾아보라는 것이 그의 충고다.★ 인터뷰 / 존 슬레이드 명예회장『돌이켜 보면 세상 만사가 사람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지요. 요즘 한국 경제가 큰 위기에 빠져 있지만, 결코 비관할 일은아닙니다. 사람 몸 만 해도 이따금씩 아팠다가는 이내 회복되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봐도 경기 부침이 반복돼 왔지만, 결국에는 성장 폭이 더 컸던 게 사실이지요.』존 슬레이드 베어 스턴즈 명예회장은 맨해턴 파크 애비뉴 본사 빌딩 7층의 구내 레스토랑에서 <한경 비즈니스 designtimesp=7935>와 오찬 인터뷰를 갖고 『다만 한국이 이전보다 더 강한 체질로 되살아나려면 도대체무엇이 위기를 불러왔는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re-evaluation)과대책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 위기에 빠진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그동안 환율을 인위적으로 고평가했던 것이 주원인의 하나라고생각합니다. 그 반작용으로 갑작스레 환율이 급락하는 바람에 자산가치가 폭락하고, 이것이 외국 금융 자금의 회수로 이어져 위기를맞은 셈이지요.』▶ 그렇다면 위기를 어떤 식으로 극복해야 할까요.『경제 전반을 분야별로 재평가하는 일을 서둘러야 합니다. 과연어느 부문에 거품이 있었으며,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이 참에 정밀하게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병을 올바로 고치려면 병인(病因)부터정확히 진단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미국 경제에도 거품이 잔뜩 끼어있다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특히주가가 너무 고평가돼 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어느 정도 조정 과정을 거칠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조정 폭이 현 수준의 5% 이상은 넘지 않을 전망입니다. 미국 증시의주변에는 대기 자금이 아직도 풍부하거든요.▶ 건강 관리에 비결이라도 있습니까.『모든 일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담배는 20여년 전에 끊었고, 독주(毒酒)도 절대 입에 대지 않습니다. 대신 붉은 포도주를 하루 두잔 정도씩 마십니다.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잠을 깨서, 25분 정도 실내 자전거 운동을 하지요. 집(맨해턴 파크 애비뉴70가의 아파트)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한 25분 걸리는데 매일 도보로 출퇴근하고 있습니다.』▶ 인생 철학을 들려주시지요.『세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라, 열심히 일하라, 몸 담은 직장에 충실해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인간 만사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디다. 무슨 일이든 성공의 비결은한 10%가 부지런함, 또 다른 10%가 지혜라면 나머지 80%는운(運)이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