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교육 분야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정신문씨(54)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하지만 그는 자기 분야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강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특히 지난해 1월에는 직원5명으로 컨설팅연구원을 설립, 탄탄한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경제가 죽을 쑤고 있는 요즘도 한달에 20여 차례씩 강의에 나가며 열정적으로 뛰고 있다.정씨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전남 해남이고향인 그는 가정형편상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17살 때 서울로올라왔다. 하지만 맨주먹인 그에게 서울생활은 고달프기만 했다.그동안 거친 직업만도 용접공, 봉제공, 식당종업원, 철공소직원,공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자녀도 셋이나 두었지만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아이들이 크면서 오히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됐다. 한번은 아내가 생활고를 견디다못해 친정으로 도망가버렸고, 이를 보다못한 정씨는 자살을 결심하고 북한강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인생의 중반에 접어든 37세 때의 일이었다.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 어렵지만 단란하게 살던 어느 날 정씨는 문득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다. 당시 그는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평소 마음 속 깊이간직했던 아내에게 인정받고 자식에게 존경받는 아버지는 커녕 고생만 죽도록 시키는 못난 남편, 못난 아버지가 될 것이 뻔했다. 더욱이 자신의 빈곤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기는 죽는 것보다 싫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마음을 다졌다. 불혹의 나이를 막 넘긴 42세 때의 일이었다.정씨는 우선 직업을 바꿨다. 택시기사를 해서는 새로운 삶을 찾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같은 운전이었지만 택시에서 렌터카로 핸들을 바꿔 잡았다. 한손님한테 유명강사들을 태우고 다니는 렌터카 기사를 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렌터카 기사하며 새인생 설계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차를 몰아야 했기에 몸은 고달팠지만렌터카 기사 자리는 그에게 인생을 새롭게 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대학교수 등 사회저명인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하나하나 깨우쳐갔다. 특히 그는 강의를 들으며 그 내용을 노트에 일일이 기록했다가 집에 가서 다시 읽어보곤 했다. 그러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강의내용을 인용하면서 자녀들에게 편지를 썼다.지금까지 그가 이렇게 쓴 편지만도 1천여통이 넘는다. 또 강의 도중 몰랐던 내용에 대해서는 강의가 끝난 다음 차에 태우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지난 94년 마침내 정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대기업 교육담당자들의 모임인 한국인사관리협회로부터 체험학습을 주제로 강의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그동안 강의시간 때 막간을 이용해 강사들의 소개로 몇차례 강단에올라가 자신의 인생경험을 들려준 적은 있었지만 상당히 의외였다.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사람이 대기업 간부들에게 무슨 얘기를할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아까운 기회였다. 부인도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지 모른다며 부추겼다. 결국 정씨는 강단에 서기로 마음을 굳히고 강의장소인 코리아나호텔로 향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인 50세 때의 일이었다.그후로 정씨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업체 교육담당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강의요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더 이상 렌터카기사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길로 아예 전문강사로 나섰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1천여명의 강사를 모시고다니며 보고 들은 말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하루가 다르게 자신감이 붙었다.정씨는 평소 김씨를 부르면 김씨가 오고, 박씨를 부르면 박씨가 오며, 행복을 부르면 행복이 온다고 강조한다.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자신이 거의절망적인 상태를 극복하고 산업교육 분야에서 우뚝 설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굳은 의지를 갖고 이 분야에 꾸준하게 관심을 기울였던결과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