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잘 나가던 정보통신 회사에 근무하는 정모대리(33). 입사 7년차인 정대리는 요즘 같아선 정말 회사 다닐 맛이 나질 않는다.IMF체제 이후 삭막해진 사무실 분위기도 그렇지만 도대체가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다. 봉급은 연봉 기준으로 30%가 삭감됐다. 자녀 학자금 지원 등 각종 복지혜택도 완전히 없어졌다. 작년말 1차명퇴에 이어 이달말엔 또 2차 명퇴 희망자 신청을 받는단다. 지난해 명퇴대상은 과장급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입사 5년차 이상으로 자신도 대상에 포함됐다.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게다가 올해부터 연봉제가 도입되면서 인사고과 압박이 목을 조이고 있다.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퇴근시간만 늦어지고 정말이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사무실 내에선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그런 고민을 얘기할 사람이 없다. 같은 부서에 입사 동기가 한명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최대의 경쟁자다.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사무실 안에선 「너 아니면 내가 잘린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이디어 교환이나 토론은 거의 사라졌다. 회사 동료라기 보다는 전쟁터에서 만난 적군 병사같은 분위기다.◆ 적군 같은 동료… ‘회사 다닐 맛 안나’문제는 이런 답답한 직장생활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하반기에도 구조조정은 계속될테고 아마 IMF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마음 편히 회사 다닐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지금까지안 잘리고 살아남은게 어디냐며 자위를 해보지만 좀처럼 막힌 가슴이 풀리지 않는다. 『차라리 이럴 바엔…』 욱하는 마음에 명퇴신청서를 낼까도 생각해봤지만 퇴직후 실업자가 될걸 상상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대리는 그래서 요즘 아침에 회사 출근하는게 마치 지옥에 가는 것처럼 싫다.IMF이후 직장생활에 정을 잃은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명퇴」 「조퇴」 정리해고의 태풍을 모두 피하고 살아 남았지만 냉랭해진 사무실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 실제로 IMF시대에 각박해진직장생활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병원을 찾는 샐러리맨까지나오고 있기도 하다. IMF태풍은 한국 경제구조 뿐 아니라 샐러리맨들의 터전인 사무실 공기마저도 속속들이 뒤바꿔 놓고 있는 셈이다.가장 큰 변화는 명퇴에 이어 정리해고 바람이 몰아치면서 살벌해진경쟁 분위기. 회사측에선 조그만 실수라도 책 잡아 한사람이라도더 내보내려 눈에 불을 켜고 있고 직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눈물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말 썰렁합니다. 어차피 비슷비슷한 능력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중에서 몇%는 나가야 한다니 분위기가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윗사람 눈치나 보고 시키는 말 잘 듣게마련이죠. 퇴근이나 제대로 할수 있습니까. 혹시나 눈에 날까봐 일이 있건 없건 무조건 밤 9시를 넘기는게 보통이죠. 야근수당이 없어졌는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도 없습니다.』(S물산 이OO 대리) 기업들의 연봉제 도입 확산은 이런 냉랭한 직장 분위기를 더욱 얼어붙게 하고 있다. 특히 인사고과가 연봉책정의 결정적인 잣대가되면서 실적주의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심지어 동료나후배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일도 생겨난다.◆ 인화보다 이기주의·면피주의 기승작년말부터 연봉제가 시행된 한 대기업의 K과장(41). 그는 평소 갖고 있던 아이디어로 최근 기획안을 만들어 부장에게 보고했다가 황당한 일을 당했다. 부장이 기획안에 결재는 않고 기안자를 자기 이름으로 바꿔 위에 보고해 버린 것. 내놓고 기획 아이디어를 도둑질당한 셈이지만 부장에게 항의 한마디 할수 없었다.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쉽고 생색나는 일은 상사 자신이 도맡아 처리하면서 부하 직원들에겐 어렵고 힘든 일만 시킨다』(K건설 김OO씨)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팀워크나 인화보다는 이기주의와 경쟁심리만 가열되고 있다. 『옆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가 경쟁자라는 생각 때문에 개인 플레이가 많아졌지요. 일에 대한 부담보다도 주변 동료들과의 서먹해진 분위기가 더욱스트레스입니다.』(D사 최OO 대리)물론 연봉제 도입이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 면도 있다. 직장내 자기계발 붐이 그렇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중견그룹 계열사의 K계장(27). 그는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토익시험점수를 올리기 위해 매일 퇴근후 영어학원에 다닌다. 벌써 6개월째다. 몸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뭔가 자신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생각에 마음 한편 뿌듯하다는게 K계장의 설명이다.또 하나 IMF시대에 바뀐 직장 풍속도는 바로 점심문화. 회사 밖에나가 부서원끼리 회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대신 구내 식당파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구내식당이 없는 회사에선 도시락을 싸 갖고 오는 알뜰한 샐러리맨들도 있다. 『부서 경비가 절반이하로 줄어 들면서 부서 회식비 등으로 쓰던 부비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당연히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자체 해결해야지요. 팀원들이 밖에 나가 식사를 하는 경우에도 더치페이(각자 부담)가 원칙입니다. 팀장의 주머니 사정도 뻔한데 매번 부담을 줄수야 없지 않습니까.』(H시스템 이OO씨)퇴근 길 문화도 마찬가지다. 으레 우르르몰려가 한두잔 걸치던 습관도 이젠 옛날 얘기가 돼버렸다. 호기있게 술값을 계산하던 선배들도 모두 꼬리를 내렸고 어쩌다 술자리라도 마련되면 이런 핑계저런 핑계를 대고 피하기 일쑤다. 『무엇보다 사무실 사람들과 술마시는 것 자체가 흥이 나지 않습니다. 서로 술을 마셔 봐야 각박해진 신세타령 뿐인데 술맛이 나겠습니까. 차라리 집에 일찍 들어가 아내와 함께 먹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더라구요.』(H그룹박OO과장)자연히 동료애 보다는 경쟁심리, 일할 의욕보다는 면피주의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게 요즘 많은 회사들의 사무실내 분위기다. 모두가 거대한 기계 속의 나사처럼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회사인간으로변하고 있는게 IMF시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이랄 수 있다. 거리로내몰린 실직자나 그래도 회사에 책상을 붙들고 있는 샐러리맨이나IMF시대가 고달프긴 마찬가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