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0억~30억원씩 흑자를 내는 기업이 갑자기 부도위기에 처했다.부채비율이 49%밖에 안되는데 가능성 없다며 모든 기업들이 투자를거부했다. 결국 경쟁사에 찾아가 투자를 요청해 겨우 부도위기를모면했다. 그리고 사업방향을 바꿨다. 얼핏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난 15일 발표한 논픽션 한글과컴퓨터의항복스토리다.한글과컴퓨터의 패배에 대한 분위기는 다소 감정적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투자조건으로 한글과컴퓨터에 아래아한글의 개발을 포기하도록 했다고 알려졌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측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마이크로소프트측은 『한글과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 사업 포기를전제로 투자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사실과 다르다』며 『투자가의 입장에서 수익성을 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마이크로소프트측은 『한글과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사업포기를 계약서에 명기할 수 없지만 한글과컴퓨터에 투자하는 이유는 수익성이 없는 워드프로세서사업을 접고 신규사업을 찾았기 때문』이라고밝혔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동기야 어쨌든 한글과컴퓨터는 아래아한글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최대 수혜자는 마이크로소프트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측은 『아래아한글의 소스코드공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이해가 걸려 있어 소스코드에 대한 권리를 갖고 관여할 수 있다』며 『소스코드의 공개 및 제3자 매각을 제지할 수있다』고 밝혔다.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사장은 『워드프로세서는 시장성이 없어 이미 2년전부터 워드프로세서사업을 포기하려 했다』며 『한글과컴퓨터는 워드프로세서시장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 것』이라고말했다.◆ 매출액 대부분 기술 사용료 지급워드프로세서의 시장성이 없다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워드프로세서는 컴퓨터사용의 기본프로그램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수익성을 내는데 한계가 있다. 워드프로세서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연구개발 및마케팅 비용이 한해 1백억원 이상 들어간다. 워드프로세서는 그 자체의 성능뿐 아니라 관련 응용프로그램과 제대로 호환되는가가 중요한데 이를 위한 연구개발비용이 적지 않다. 워드프로세서 하나만으로 영업해서 수지를 맞추기는 쉽지 않다.물론 한글과컴퓨터가 워드프로세서시장을 홀로 지켜내기에는 버거웠던게 사실이다. 지난해 한글과컴퓨터가 연구개발에 들인 비용은1백41억원이었다. 이중 연구원들의 인건비 비중은 얼마되지 않는다. 한글과컴퓨터 전체 인건비가 지난해 총 8억5천만원에 불과했다. 아래아한글 개발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기술사용료지불이다. 1백41억원중 1백억원을 국내외 전문업체에 기술사용료를지불하는데 사용했다. 한글과컴퓨터가 자사의 소프트웨어와 넷스케이프를 연동하기 위해 지불하는 라이선스만 연 10억원이다. 이밖에도 전자사전, 필터, 폰트 등에 기술사용료를 지불했다.아래아한글은 보통 한해에 30만카피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아래아한글패키지의 판매가격은 보통 12~16만원선. 단순 계산하면한글과컴퓨터의 매출은 3백60억원에서 4백80억원이나 된다. 그러나한글과컴퓨터가 소프트웨어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지난해 1백47억원에 불과하다.단순계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다. 이런의문은 소프트웨어판매의 다수를 차지하는 번들을 보면 쉽게 풀린다. 번들은 컴퓨터를 사면 함께 끼워주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그런데 번들가격은 일반소매가격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헐값이다.그러나 한글과컴퓨터의 실패의 원인을 단지 시장상황으로 돌릴수만은 없다. 시장에 적응하지 않는 경영전략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소비자가 원하는대로 기업이 바뀌어야 하는데 한글과컴퓨터는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상품에 맞추라고 강요했다.한글과컴퓨터의 주 고객은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다. 개인이 워드프로세서를 쓰게 하는 가장 주 유인은 다양하고 강력한 성능이 아니다. 오히려 프로그램이 작고 간편해 실행속도가 빠르고 사용이 편리해야 한다. 그런데도 한글과컴퓨터는 기업용 수요를 겨냥하고 만든 MS오피스와 성능경쟁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기술을 비싼 가격에 수입해와 한글에 끼워넣었고 프로그램크기도 엄청나게 늘었다. 결과적으로 실행속도가 떨어지는 등 사용도불편해졌다.개인을 주고객으로 하면서 판매전략도 정반대로 나갔다. 한글과컴퓨터가 신제품인 한글97을 팔때 소비자들은 워드프로세서 뿐 아니라 다른 소프트웨어까지 덤으로 사야했다. 소비자는 워드만 사고싶어도 아래아한글을 사용하려면 다른 소프트웨어도 함께 사야했다. 워드만 따로 살수 있도록 단품으로 낸건 마이크로소프트가MS워드97을 무료로 배포하고 TV광고를 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다음이었다.물론 불법복제가 소프트웨어시장의 발전에 걸림돌이 됨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시장에서 불법복제가 반드시 기업을 망하게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다. 일단 손에 익은 소프트웨어는 잘바꾸지 않게 된다. 처음엔 복제해 쓰지만 후엔 돈을 주고 구매하는것이다.사실 아래아한글이 한해에 30만카피를 돈을 받고 팔수 있었던 것은불법복제로 아래아한글에 맛을 들인 수십만명의 「충성심」이 생겼기 때문이다.한글과컴퓨터의 침몰원인은 또 있다. 전문 경영인의 부재라고 볼수있다. 이찬진사장 본인 역시 경영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경영에 참여했던 다른 경영진도 마찬가지였다는 평이다.한글과컴퓨터의 무리한 사업확장 역시 실패의 원인이다. 출판, 인터넷접속서비스, 마우스 및 키보드판매, 하드웨어 유통, CD타이틀판매, 컴퓨터교육, 인터넷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댔다 떼기를 반복했다. 한군데 역량을 집중해도 안될 판에 여기저기 역량을분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벤처기업이 재벌을 흉내냈다는 비판도있다.무엇보다 문제가 되는건 『워드프로세서시장은 없다』고 단언하는이찬진사장의 태도다. 시장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다만 일반인들이 보지 못할 뿐이다. 기업가란 호칭이 공연히 생기는게 아니다. MS오피스가 장악하고 있는 오피스용 워드프로세서시장에서 승산이 없어 보였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워드프로세서와 관련된 시장은 기업가가 찾기 나름이다. 그 시장이 개인일 수 있고 기업일 수도 있다. 웹에디터나 새로운 웹문서양식인 XML편집기가 대표적인예다. 그런 시장을 찾는게 벤처기업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