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기업과 금융기관에 구조조정이 더디다며 다그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며 닦달이다. 정부가시키는대로만 하면 경제위기를 빨리 해소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게 못내 한탄스러운 모양이다.그러면 과연 정부는 변했다고 할수 있나. 관료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 자신할 수 있나. 결론적으로 정부종합청사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은 냉담하기만 하다. 외환위기 이전이나이후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도 한다.무엇보다 정책패턴에 변화가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서로 다른 부처로 넘기지 못해 안달이다. 떠넘길만한 부처가 없다면 깔아뭉개기 일쑤다. 뚜렷한 방침이 없으니 하루는 된다고 했다가 다음날은 안된다고 했다가 오락가락이다. 반면에 생색나는 일은 너나없이 한마디씩 거든다. 대통령이 관심을 갖는 사항이라면 부작용도아랑곳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인다. 오히려 건수 잡았다며 이 기회에 원없이 예산도 쓰고 자리도 만들자는분위기다.어려운 일을 서로 떠넘기는 대표적인 사례는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다. 물론 법령 제·개정, 금융기관 인허가는 재정경제부담당이고 금융감독에 관한 각종 시행규칙과 지침의 작성은 금융감독위원회가 맡도록 돼있다. 명문화된 것으로만 보면 구분이 확실하다.그러나 현실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5개 은행 퇴출을 둘러싼 혼선만 봐도 알수 있다. 5개은행에 대한 신탁계정처리와 관련, 재경부는 인수하는 은행이 신탁계정도 인수하며 자산실사후에도 9%의수익률은 보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금감위는 은행들에 밀려 신탁계정은 인수하지 않고 자문해주는 계약만 체결하겠다는 요구를 수용했다. 또 신탁계정의 수익률은 보장하기 어렵다는 입장을보였다.두 기관간의 혼선이 부각되자 재경부는 「신탁계정문제를 포함해서퇴출은행처리는 기본적으로 금감위 소관사항」이라며 발을 뺐다.또 금감위는 금감위대로 「신탁계정처리문제는 손실을 어떻게 나누어 부담하느냐와 예산지원의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 재경부의 입장이 중요하다」고 공을 재경부로 넘겼다. 이렇게 핑퐁식으로 오간끝에 결국 퇴출은행 신탁예금자들만 혼선을 빚었다. 지금이라도 미리 신탁상품거래를 해지하고 원금만이라도 찾을 것인지, 아니면 계속 갖고 있을지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정부측은 아직까지 완전히정리된 입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만약 퇴출은행에 대한 자세한자산부채 실사후에 신탁만기가 돌아온 고객들이 원금도 못찾게 되면 그때에도 실적대로 배당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중이다. 실사전에미리 중도해지를 해서 원금을 건진 고객들과의 형평이 문제가 되기때문이다.◆ 은행 정상화 놓고 재경부-금감위 마찰조건부로 경영정상화계획을 승인받은 7개 은행문제도 마찬가지다.특히 조흥 상업 한일등 대형시중은행의 진로는 향후 은행산업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와 연관된 중요한 문제다. 재경부나 금감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해서 일정한 방향을 도출해야하는 문제다. 그러나 합병이 바람직한지, 외자유치를 통한 자력갱생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이 없이 서로 미루고 있다. 평소에 『은행업은 정부가 인허가를 준 업종이기 때문에 깊게 개입해야 한다』는 은행감독론을 펴왔던 인사들도 요즘엔 『은행자율로 결정해야한다.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수는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자력갱생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고, 합병을 하기에는 부작용이 많을 것 같고 해서 어정쩡한 입장들이다. 실무자들은 『언제 한번 입장을 정리해야 할텐데…』라면서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다.기획예산위원회와 재경부가 공기업민영화업무를 어디서 담당할 것이냐를 놓고 오락가락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김대중대통령은 공기업 민영화를 기획예산위원회에 맡겨 과감하게 추진하도록주문했다. 옛 재경원이 수년간 질질 끌면서 거의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경부는 법률적으로 자신들의 업무라며 내심 불만을 터트렸다. 이러던 차에 기획예산위원회 고위층들은 공기업 민영화 문제가 복잡한 사항들을 고려해야 하는 난제라는 것을 깨닫고실질적인 업무추진은 재경부에 넘기기로 했다. 전체적인 그림은 기획위가 그리되 실제 집행은 재경부에 맡긴다는 것이었다.잘못하다가는 개혁의 주역이 되기는 커녕 외환위기가 지난뒤 공기업을 헐값에 외국에 팔아넘기고 기간산업을 망친 역적으로 몰릴수도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는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또 기획예산위원회에 실무적인 경험이 있는 재원들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재경부는 덥석 업무를 인수하려다가『공기업 민영화가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에 직면해 몸을 낮추었다.이와는 반대로 단순하고 생색나는 일은 서로 챙기려는 경우가 많다. 건설교통부는 주택저당채권(MBS)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주택금융공사를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침체된 주택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수천억원의 예산을 요구한상태다. 그러나 주택전문가들은 『수천억원의 자금을 주택업계에공급한뒤 공사는 부실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산하에 금융기관을하나씩 설치하려는 낡은 생각일뿐 효과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지도않았고 다른 대안은 아예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연초에 실업문제가 심각해지고 대통령이 실업대책을 강조하자 노동부가 『20조원의 재원이 필요하다』며 실업세 신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도 비슷한 사례다. 20조원이 어디에 필요한지도 전혀 대지 못했고실업세 신설이 재정과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도 않은 주장이었다. 현안이 생겼다하면 무조건 자금부터 요구하고 일을 벌이겠다는 발상이다. 정작 정리해고와 같은 핵심문제에 대해서는 이율배반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근로자와 기업들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는 찾아볼 수 없다. 흐리멍텅한 상태로 내버려두자는게 노동정책인 셈이다.재경부는 또 금융경색해소가 시급하다며 국책금융기관에 대거 예산을 확보, 증자를 지원키로 했다. 금융경색덕분에 오히려 반사이익을 본 셈이다. 시중은행에는 부실경영에 책임을 물어 임원을 줄줄이 교체했지만 국책금융기관임원들은 아직도 순서대로 자리를 나눠갖는다. 한보 기아등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은 어느 시중은행보다많은데 말이다. 금융기관에 대한 낙하산인사가 아직도 끊이지 않고있는데서도 정부의 개혁의지가 어떤 것인지를 알수 있다.◆ 외환위기 책임공방IMF사태이후 외환위기를 둘러싼 책임공방도 공직사회의 몸사리기를부추기는 요인으로 지목되고있다.실컷 일해놓고도 결과가 잘못되면잘잘못에 상관없이 매도당하는 「현실」때문이다.사실 구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 관계자들은 아직도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이고있다.정책담당자로 책임이 없다고는 할수 없지만 일반에 알려진대로 관료들의 안일한 정책대응으로 인해 외환위기가 초래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는다.강경식 전부총리, 김인호 전청와대경제수석이 구속된 것도 일종의 「도덕적」책임이지,「법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이 때문에 요즘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소신있는 정책결정이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한다. 정책의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날 경우 청문회에 불려나오거나 검찰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팽배해 있다.연초 구조조정을 위해 재정경제부가 추진했던 투자은행설립방안이막판에 백지화된 것도 이같은 기류때문이다.당시 이 방안마련에 참여했던 모서기관은 『투자은행이 자칫 부실화될 경우 책임소재문제가 따른다는 지적에 따라 고위선에서 백지화했다』고 실토했다.금융감독위원회의 역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부실기업퇴출 문제도 마찬가지다. 퇴출대상기업들의 법적소송이나 말썽을 우려한 금감위측은당초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기업들만을 퇴출대상으로 발표,빈축을샀다.급기야 이헌재 위원장은 김대통령으로부터 『어떻게 그런 방안을 만들었느냐.퇴출대상기업을 들여다보니 어디서 듣지도 못한이름들 뿐이었다』는 원색적인 질책을 들었다.정부 관계자는 『주요 정책담당자들에게 면책특권을 주지않는 이상지금같은 분위기에서 소신있는 의사결정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