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흔히 들을수 있는 소리 가운데 엿장수의 가위소리와 머리카락장수의 소리가 있다. 나른한 여름 오후, 동네 개들마저 졸음에 겨워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땐 머리카락 장수의 구성진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고장난 시계나 머리카락 삽니다.』이들이 지나가고 나면 조금 있다가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린다.이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원자재를 수집, 공급한다는 것. 엿장수가 빈병과 고철을 주로 모았다면 머리카락장수는 여인들의비단결같은 머리카락을 수집, 가발업체에 공급했다. 당시 가발은합판과 더불어 국내 최대 수출산업이자 달러박스.사양산업으로 전락, 잊혀져 가던 가발산업이 90년대들어 부활하고 있다. 이른바 패션가발 열풍 때문. 가발 한 두개 없으면 멋쟁이 축에 끼이지도 못할 정도로 가발은 패션에서 중요한 위치를차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벗겨진 머리를 가려주는 기능제품에서 한걸음 나아가 옷 구두 핸드백과 더불어 패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재료는 옛날과 달라졌다. 과거엔 진짜 머리카락이 원료였지만 지금은 인조머리카락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 진짜 머리카락을 구하기가 어려운데다 인조제품의 품질이 뛰어나기 때문. 우선 색상이훨씬 다양하다. 가공도 쉽다. 퍼머를 해도 천연소재에 비해 오래가고 자유롭게 매만질 수 있다. 싫증나면 바꿔쓰면 된다. 국내가발업체들은 국내는 물론 중국에도 진출, 세계시장을 주도하고있다. 60년대의 영화를 되찾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그동안 한국업체들은 원자재를 국산화하지 못했다. 일본업체들이 가발원자재 생산을 석권, 세계시장을 주무르고 있었다.가발제품은 한국업체가 주도하지만 원자재는 일본업체가 주도하는 형태로 이원화돼 있었던 것. 가발원자재는 매우 까다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 PVC를 주원료로 10여가지 이상의 재료를혼합해야 한다. 게다가 천연머리카락과 비슷한 물성을 내려면 여러가지 노하우가 곁들여져야 한다. 많은 업체가 인조머리카락 개발에 도전했다가 눈물을 머금은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저가격으로 중국 가발업체 선호전북 익산수출자유지역에 위치한 대경(대표 황호연·46)은 이런 난관을 뚫고 인조머리카락 개발에 성공한 기업이다. 국내 첫번째이면서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개발한 것. 업체로 따지면 일본 3개사에 이어 네번째.대경은 이를 개발하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황사장은 있는 재산 없는 재산을 모두 이곳에 쏟아 부었다. 지난해 인조머리카락을 개발한뒤 이 회사는 하루 3교대 24시간 풀가동하고있다. 밀려드는 주문을 대지 못할 지경이다. 매출은 작년 16억원에서 올해는 8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대경이생산하는 인조머리카락의 품질은 일본제품을 능가하는 것으로 가발업체들은 평가하고 있다. 정전기가 일지 않고 불에 잘 타지 않는다. 불이 붙으면 그자리만 굳어지고 더이상 번지지 않는 난연성을 갖고 있다. 화상도 막을 수 있다. 열을 받아도 늘어나지 않아 가발로 만든뒤 쉽게 변형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반면 값은저렴,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제품이 ㎏당 10~16달러인 반면 대경 제품은 8달러선이다. 중국의 가발업체들이 앞다퉈 대경제품을찾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황사장이 이 분야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기회에 이뤄졌다. 이리중앙극장 등 익산에서 제법 큰 극장 2개를 운영하는 등 남부럽지않게 살던 그에게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돈버는 것이 인생의전부가 아닌 것처럼, 그는 자식에게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사업을 하는게 꿈이었다. 미래첨단산업이라는 반도체에 꿈을 품고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설비투자를 해야 하는 반도체는 그로선한낱 꿈일 따름이었다. 90년대초 그는 상공부를 찾아갔다. 뭔가보람있는 사업을 하고 싶은데 추천을 해달라는 뜻에서였다. 상공부 관계자는 거창한 것보다도 남들이 미처 못하는 분야를 하면더 보람있는 일 아니냐며 가발원사를 추천했다. 이 분야는 일본3대업체가 세계시장을 요리하고 있는데 이들 업체 규모는 국내대기업그룹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나다는 것. 이들을 따라 잡을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갖춘다면 한국의 가발산업 회생에도 큰도움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21C 유망사업…해외시장 확보나설것그는 한번 도전해 볼만한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익산수출자유지역에 대경이라는 간판을 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큰고래라는 이름의 대경은 오대양을 누비겠다는 포부가 서린 거창한 이름. 하지만 창업이후 대경은 육지에 휩쓸려온 고래처럼 허둥대기 시작했다. 법인을 만들었지만 도무지 기술을 개발할수 없었기 때문. 기술개발을 끝냈거나 충분한 개발가능성을 갖고 사업을 시작하는창업자와는 달리 황사장은 거창한 포부만 갖고 사업에 뛰어들었으니 당연했다. 그는 일본업체가 국내에서 잠시 생산하다 떠난곳에서 주워들은 풍문을 모으면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생각했었다. 이는 오산이었다. 뭔가 수를 내지 않으면 바다로 나가 보기도 전에 굶어죽을 판이었다.궁리끝에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다. 누가 기술을 주겠다는 것도아니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퇴근하는종업원을 붙잡고 귀동냥을 하거나 퇴직자를 수소문해 저녁대접을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그렇다고 핵심노하우가 나올리 만무였다. 몇달간의 일본 방문중에 대충 얼개를 파악한뒤 귀국했다. 곧바로 우수두뇌를 뽑아 기술연구소를 설립한뒤 각계의 도움을 받아가며 핵심기술 개발에 나섰다. 국내 굴지의 화학업체인 LG화학의 도움도 받았다. LG에 가발원사에 대한 기본지식을 알려준뒤PVC원료를 생산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했다. 4년동안 노력끝에가발원사의 비밀을 하나씩 벗겨 나갔고 마침내 지난해 원사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그동안 전혀 매출이 없다보니 많은 재산을 이곳에 투입할 수밖에없었고 그러는 동안 다른 사업은 모두 정리했다. 그럼에도 끈질지게 물고 늘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생시절 펜싱선수로 활동하면서 몸에 밴 집중력과 의지가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가발원사 시장은 무궁무진합니다. 지금 시장도 그렇지만 21세기엔 더욱 밝지요. 그때를 대비해 시설도 확장하고 부지런히 해외거래처확보에 나설 생각입니다.』황사장은 LG화학이 갖고 있던 원료생산시설을 최근 인수했다. 수직계열화에 나선 것이다. 오는 2001년 매출을 4백억원으로 잡을정도로 의욕적인 목표를 잡고 있다. 시장이 해마다 커지고 있는데다 세계최대 생산국인 중국의 가발업체 가운데 절반 가량이 한국계 투자기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라고 소개한다. 큰고래가 오대양의 물살을 힘차게 가를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것 같다. (0653)833-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