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경제운용 방향을 놓고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재정경제부를 필두로 한 정부는 본격적인 「경기부양」에 정책의 최우선 포인트를 두고있는 반면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신중론을개진하며 정부의 발목을 붙들고 있다.물론 한은이나 KDI도 경기진작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극도로 위축된 투자와 소비를 살리지 않고서는 장기불황의 그늘을 피할 수없다고 보고 있다.이들은 그러나 정부의 정책접근 태도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주변여건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경기부양에 대해 어느정도의 자신감을 갖는 것은 좋지만 정책수단들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모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특히 인위적인 금리인하나 구조조정 작업의 성급한 완결은경기부양의 순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을만큼의 부작용이 있을 것으로우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KDI는 「선(先)구조조정 - 후(後)경기부양」으로, 한은은 「시장 존중론」으로 맞서고 있다.이같은 양상을 놓고 정부측은 양 기관의 「차별화 전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IMF사태이후 달라진 위상과 입지를 감안, 더 이상 정부의 거수기 노릇을 하지않겠다는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두 기관은 구 재정경제원의 직할통치를 받았다. 한은은 명색만 중앙은행이지,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재량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KDI 또한 마찬가지로 「관변단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좋게 보면 「조언자」의 역할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정책을 합리화하는 「나팔수」로 표현되곤 했다. 그러던 것이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은은 법적 권능을 인정받은 통화신용정책에 있어서 재경부의 입김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경우에 따라 신경질적인 반응도 서슴지 않는다. KDI 또한 독자적인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존립근거를 잃는다는 절박감에서, 또 이제라도 「감시자」의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정부에 비판의칼을 대고 있다.결국 정부가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정책을 수립, 유관기관들을 일사불란하게 독려해 나아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기왕에발표된 경기부양책은 그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높지만 고비때마다양기관을 설득하는게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경기부양을 둘러싼 논란 역시 내년 상반기까지는 지리하게 이어질 것으로예상돼 그 귀추가 주목된다.◆ 재경부의 경기부양 우선론정부는 지난 12일 경제부처 장관들과 여당 고위당직자들이 참석한당정회의(사진)를 열고 금리인하와 주택·부동산 경기진작책을 골자로 하는 「99년 경제정책방향」을 확정했다. 올해말로 금융 및기업구조조정도 일단락되는만큼 정책역량을 경기부양에 집중시키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우선 부동산 거래활성화를 통해 경기에 불을 지필 계획이다. 이를 위해 최근 1가구1주택자의 양도세 비과세요건을 현행「3년이상 보유」에서 「1년이상 보유」로 완화했다. 또 수도권내전용면적 25.7평 이하 공영개발택지안에 건설되는 아파트의 분양가도 자율화하기로 했다. 여기에다 내년중에 4조원의 주택 중도금 대출자금을 풀어 가구당 5천만원까지 주택구입 중도금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예산측면에서는 통합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의5%(22조5천억원)로 유지하면서 전체 투자사업예산의 70%이상인25조원 가량을 상반기에 배정키로 했다.다른 한편으로는 통화의 지속적인 확대를 통해 실세금리를 연 5%안팎의 초저금리로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그동안 금리가 떨어져온 여건과 그 속도를 감안해보더라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물론 이 과정에서 예대마진(여신금리와 수신금리간 차이)이 높은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관리·감독을 강화해나간다는 복안이다. 이렇게 되면 금융비용 경감으로 인해 기업들의 투자활력을 높일 수 있고 주택자금등 서민들의 가계대출도 늘어날 것이라는 계산이다.정부는 이같은 구상을 토대로 내년도 경제운용목표를 △경제성장률2% △소비자물가 상승률 3% △경상수지 2백억달러 흑자등으로 책정해놓고 있다. 재경부의 현오석 경제정책국장은 『금리 유가 환율등「신3저」의 바람을 타고있는 지금이야말로 경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내년 하반기이후 국내경제는 확실하게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KDI의 구조조정 우선론KDI는 당정회의 나흘뒤인 지난 16일 「99년 경제전망 보고서」를발표했다. KDI는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2.2%, 물가상승률을 1.6%로각각 내다봤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의 계산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그러나 경제운용 방법론에서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KDI측은 『경기진작은 반드시 구조개혁을 전제로 디플레(자산가치 하락)를 방지하는 차원에서만 추진돼야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대신 『금융시장이 안정세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미흡했던 부실대기업 구조조정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하고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KDI의 이같은 입장은 아직도 금융위기가 불식되지 않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한국의 외환위기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KDI내 소장파 박사들의 생각은 다르다.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일부 부실금융기관은 퇴출됐지만 금융기관및 기업들의 부실이 완전히 해소됐느냐는 반문이다. 따라서 성급하게 경기부양에 나섰다간 부동산시장에서 거품만 잔뜩 안은채 자멸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KDI는 실례로 최근 주식시장에 나타난 「거품」을 지적하고 있다. 여러차례의 폭등장세를 거쳐일반투자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자 어느 순간 주가가 곤두박질치는것 말이다.◆ 한국은행의 시장존중론한은은 통화확대를 통한 초저금리 유도정책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이다. 드러내놓고 정부측을 비난하는게 아니라 아예 「정부가 그럴리가 없다」는 쪽으로 깔아뭉개고 있다. 그 배경에는 통화신용정책의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한은의 독자적인 권능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나아가 이 기회에 정부에 대한 한은의 위상을 확실해해두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그러나 이같은 역학관계 외에도 한은이 정부의 금리정책을 반대하는 이유는 있다. 한은의 전통적인 논법중의 하나인 「시장존중론」이다. 무엇이든 인위적으로 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 이 논법의핵심이다.한은 자금부의 한 관계자는 『금리를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계획은도저히 있을 수 없다』며 『한은도 금리의 하향안정화를 고대하고있지만 금리는 전적으로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금융경색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리를 인위적으로 인하할 경우 금융기관의 대출영역이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RP(환매조건부채권)금리의 추가할인을 바라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도 선을 분명히 긋고 있다. 한마디로 「정책과잉」이라는 비판이다. 한은의 또 다른 관계자는 『무엇이든 마음먹은대로 할 수 있다는 의식과 관행이야말로 정부가 고쳐야할 폐습』이라고 꼬집었다.어쨌든 한은은 아직까지 내년도 통화공급과 관련된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IMF와의 협의라는 변수가 있기도 하지만 복잡다단한국내경제구조속에서 한은의 계산도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인 것으로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