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관람객과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이렇게 저렇게 그림의풀이를 가능케 하는 여지 같은 것이다. 그 여지의 공간은 열려 있다는 점에서 관람객을 자유스런 감상의 세계로 이끌기도 하고, 반대로 그 열린만큼의 분방함으로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한국경제신문 후원으로 사비나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돈(錢),돈(回), 돈(狂)」전은 그러나 이같은 「안전거리」를 거부한다. 은유의 장치를 거쳐 돌아가기 보다는 「날것」의 물성 그대로를, 한단계 올리는 승화보다는 삐딱하게 내려다보는 「비꼼」을 그 도구로 삼는다. 그래서 작품이 주먹을 날린다면 관람객은 피할 겨를도없이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제목 그대로 주제는 「돈」이다. 돌고 도는(回) 돈(錢) 때문에 돌고마는(狂) 인간의 삶이랄까. 돈을 주체로 보자면 돈의 속성(回)과그것이 인간에 미치는 힘(狂)이다. 예술과 돈은 서로 마주하면 부끄러운, 또 가능한한 마주해서는 안될 그런 관계로 여겨져 왔지만여기서 그 둘의 만남은 순조롭다. 서로 날것의 냄새를 그대로 풍기도록 눈감아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돈의 구린 뒤를 캐면서 예술도 그 은근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먼저 겹겹이 싸여 있는 돈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대로 도마 위에올리는 작품을 보자. 김태헌의 은 10원짜리 동전으로 촘촘히 채운 화면 위에 돼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홀대받는 10원짜리동전으로 무언가 이루어보려는 알뜰함에 대한 비웃음이거나, 혹은찬양일 것이다. 이종구의 <화혼, 부의, 상속 designtimesp=18052>에서는 만원권 지폐가주인공이다. 세상사에 필요한 미덕이 돈으로 대체되는 과정이다. 접시에 밥 한 덩어리와 복권을 정성스럽게 담아놓은 박불똥의<600만의 주일성찬-복권밥>은 1주일에 팔려나가는 복권이 6백만 장이라는 것과, 돈은 행복을 내려주는 종교와 같음을 설명한다. 이명복의 <난 안먹었다 designtimesp=18053>는 지폐를 양분 삼아 몸뚱이를 살찌우는 권력형인간의 모습을 초등학생도 알아보기 쉽게 묘사하고 있다.상하로 위치지어진 돈과 인간의 관계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이들은돈 위에 군림하는 모습으로 그 새로운 질서 세우기에 도전한다. 안윤모의 <돈? 실례 designtimesp=18056>라는 작품 속에서 작가는 엉덩이를 관람객 쪽으로 내밀며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이쪽 세상을 한껏 조롱한다. 지폐에 쓱쓱 낙서를 하기도 하고, 쿠키 조각을 붙이면서 돈에 물리적인폭력을 가하는 한용권의 <즐거운 놀이 designtimesp=18057>도 돈의 신성을 무시하기는마찬가지다.김형모의 작품들은 아예 전시관 조명 아래서 버젓이 돈과 타협한다. 돈무늬가 새겨진 동판으로 쇼핑백을 제작해 값을 매겼다. 그것도 작품가격 얼마가 아니라, 큰가방 얼마, 작은 가방 얼마 이런식이다. 이전까지가 돈과 인간의 관계를 들춰본 것이라면, 그는 돈과예술의 은밀했던 사이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참가작가는 젊은 미술인 20명으로 회화와 조각, 설치, 오브제를 이용한 작품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전시 분위기는 내면의 깊이로 들어가기보다는 가볍게 들떠 있다. 이 가벼움은 작가들의 스스로를 향한 비웃기에서 기인한다. 「너」에 대한 질책보다는 「우리」 쪽으로의 손가락질이기 때문에, 그 비웃음은 뒤틀려 있지만도리어 뒤끝이 없다.이 과정에서 자신의 천박함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비웃음은 용기가 되고, 그 솔직함은 다시 반성의 토양이 된다. 그래서 인간과 돈과 예술이 충돌하며 엮어진 관계들을 좇아가는 작업이 아무런 결론없이 그저 대립하는 모습으로 남아도, 심각한 고민은 없다. 그런까닭에 더더욱 가볍고 경쾌한지도 모른다. (2월7일까지,02-736-4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