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지붕의 곡선을 멋들어진 네온사인으로 치장한 동대문.그곳에서 바라본 동대문시장의 밤 풍경은 흡사 부채꼴 모양으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왼쪽으로 「우노꼬레」 「해양엘레시움」의 높다란 불빛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두산타워」 「밀리오레」 「프레야타운」등이 우뚝 솟아 있다. 눈길을 수평으로 주면 「흥인시장」 「평화시장」이 야트막하게, 그러나 동대문 로터리의 일각을 큼직하게 베어문 채 포진해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인파로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최근 몇년 사이 현대식으로 단장된 빌딩형 상가와 수십년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온 재래시장. 서울을 떠난지 몇 년만에 동대문 시장을 찾은 이들은 우선 그 기묘한 조화에 놀란다. 「없는게 없고 못구할 것이 없다」던 남대문시장의 단골 손님들도 어쩌다 들른 동대문 시장의 「위용」에 새삼 감탄사를 연발한다.하나같이 「여기가 이렇게 변했느냐」는 반응들이다. 그것 뿐이랴.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도 완전히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40~50대가 주류를 이루었던 동대문 시장의 손님들은 20~30대로 대체됐다. 그중에서도 20대 초반의 젊고 감각적인 여성들을 주요 고객으로 보면 맞다. 소매형 매장으로 일컬어지는 「밀리오레」 「두산타워」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강력한 비트와 경쾌한 리듬을 가진 노래, 통칭해서 그런 록풍의 노래들이 매장 입구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매장 앞에는 귀에 리시버를 꽂은 진행요원(주차요원)들이 무전기에다 쉴새 없이 뭔가를 떠들어댄다.새벽 1시30분. 대여섯명의 젊은 여성들이 「두산타워」앞에 서 있다. 2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는 그녀들은 미처 약속시간에 대지 못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몇달 후의 유행을 알려면 먼저 동대문엘 가보라」는 소문답게 저마다 개성있는 차림들이다. 대담하되 난삽하지는 않고, 튀되 요란하다고는 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 무슨 일로 왔느냐는 물음에 그들은 이화여고(서울 정동 소재) 제110회 동창생들이라고 한다. 고교를 졸업한지 4년쯤 지난 셈이다. 그중의 이수민씨(22)는 『요즘 우리뿐만 아니라 동창모임을 동대문 시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주차가 쉽지는 않지만 번잡한 낮시간을 피할 수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젊은 분위기가 좋다』고 말한다.물론 쇼핑은 기본이다. 「밀리오레」는 1층에서 3층까지 숙녀복 전문매장이다. 여성들은 좋은 물건을 고르기 위해 구석구석을 눈여겨 본다. 인산인해(人山人海)라면 과장이겠지만 가볍게 어깨를 스칠 정도의 사람들이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동대문에서는 물건을 사는 사람의 능력이 중요하다. 얼핏보면 비슷한 품질인 것 같지만 제품간 격차는 꽤 큰 편이다. 똑같은 돈을 주고도 친구가 더 좋은 제품을 구입하면 은근히 속상하는게 이 시장의 특징이다.하루중 19시간 문을 연다는 전문식당가들도 좋은 군것질거리를 제공한다. 새벽 서너시에도 자장면이나 피자를 맛볼 수 있다. 이 때문에 20대후반-30대초반의 미시족 주부들도 친구들과 만나 「한 밤의 쇼핑」을 즐기곤 한다. 밀리오레의 아동복 코너 「203」의 판매원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쇼핑을 오는 젊은 주부들이 많다. 대부분 남편과 함께 오지만 친구들과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동대문은 신흥 데이트 장소로도 각광받는다. 연인들은 「바쁠 것 하나 없다」는 투로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매장들을 오르내린다. 대개 고층에 위치한 액세서리나 패션잡화 매장은 연인들의 단골 쇼핑몰이다. 모자 수영복등 바캉스용 상품을 고르는가 하면, 아래층에서 사들고 올라온 옷가지에 어울릴만한 물건들을 찾기도 한다. 두산타워 5층에 자리잡은 「DUM」의 사장 김태형씨는 『동남아 등지에서 들여온 가죽벨트나 장신구가 꾸준히 나간다』며 『시시각각 바뀌는 젊은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 제품 사이클을 빠르게 가져가고 있다』고 소개한다.동대문은 또한 국제시장 내지는 관광명소로 발돋움할 기세다. 야심한 시각에도 외국인들을 부려놓은 전세버스들이 길게 주차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중국 동남아 등지의 관광객들은 가이드 없이 자유롭게 쇼핑을 즐기고 있다. 그들도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고 믿는 눈치다.그러나 아무래도 시장은 시장이다. 지방에서 「차떼기」를 위해 상경한 사람들은 「해양엘리시움」이나 「우노꼬레」에 승합차들을 세워둔 채 한아름씩 물건을 실어댄다. 한켠에 늘어선 리어카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물론 지게꾼들도 있다.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는 총총 걸음으로 달려가는 그들에겐 모처럼의 「호황」이 반갑기만 할 것이다. 대구에서 「월드 패션」이라는 옷가게를 운영한다는 김정희씨(29)는 『일주일에 한번씩 이곳을 찾는다』며 『좋은 물건만 갖고 가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고 말한다.이제 동대문시장을 빼놓고는 서울의 야경을 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흡입판처럼 한 여름밤의 정경을 빨아당긴다. 그 속에 수많은 사람과 물건들, 젊은 에너지들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동대문 시장의 전성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