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즐기는 창조적 행위 … 성 해방은 영원한 과제

지난 4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 칼럼을 이제 끝내기로 했다. 95년12월12일 창간호부터 연재해왔으니 거의 만4년을 써온 셈이다. 필자 개인 사정도 있고 이제 그만 써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필자의 본업이 갈수록 바빠져 더 이상 칼럼쓰는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한 꼭지 칼럼을 쓰는 것은 사실 적지 않은 노고가 드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야 하고 논리를 세우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때문에 최근에는 매우 부실한 칼럼이 되고 말았다.이제 칼럼을 끝내면서 필자가 어떤 사람인지 밝혀야 할 것 같다. 사실 필자는 한국경제신문에서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다. 정화담은 필명일 뿐 본명은 따로 있다. 많은 분들이 정화담을 찾아 전화를 걸어오고 편지를 보내주셨지만 굳이 필자를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독자들에게 약간의 궁금증을 드리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화담이라는 이름은 송도의 서화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와이담(Y담)에서 따온 말일 뿐이었다. 필자의 작명이 아니라 <한경BUSINESS designtimesp=19236> 초대 편집장을 맡으셨던 김형철 선생의 작명이다.당초 이 칼럼을 쓰게 된 것은 우리 사회에 성담론은 많은데 정작 이야기다운 이야기는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다루고 있는 성담론은 기껏해야 비뇨기과 의사선생들께서 출연해 남녀성의 물건이나 섹스 능력에 대해 의학적 상식을 나열해 가는데 불과했다. 그러나 섹스는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섹스는 문화이면서 동시에 경제이기도 하다. 육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이며 인간만이 창조적으로 즐기는 그런 행위를 우리는 섹스라고 부른다.인간이 원숭이를 벗어났을 때부터 섹스는 인간의 경제행위를 규정하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생산양식을 결정해온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물론 이 반복은 언제나 창조적인 반복이었다.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했지만 그들의 콤플렉스는 지배력에 비례해 오히려 깊어졌다. 이런 것이 문화라는 이름을 갖는 섹스의 등가물이었다. 미학(美學) 역시 섹스의 반사경이기는 마찬가지였다.지금 우리는 섹스의 위기시대를 살고 있다. 성해방의 논리는 곧 우리가 아는 성문화의 반란에 기초해 있다. 산업의 패턴이 바뀔 것이며 사회윤리의 기본 덕목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아들」인 우리의 고민일 뿐 그것이 우리 아들들의 고민은 아니다. 위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안심하시라. 또 우리의 시대가 유일한 타락의 시대인 것도 아니다.어떻든 그동안의 애독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