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전무는 업무에 대한 해박함과 강한 추진력으로 남들보다 몇년은 진급을 빨리 했다. 무엇보다 그의 부지런함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승진을 발표한 날도 늦게까지 사람들과 회의를 한다. 일주일의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경우도 집보다 회사를 먼저 둘러본다. 심지어 여름휴가 중에도 수시로 회사를 들러봐야 직성이 풀린다. 아무리 따져 봐도 가정에서 그가 하는 일은 잠자는 것뿐이라고 추측된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을 키워 이렇게 출세시킨 그의 모친이 중병에 걸려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병문안을 간 사람들에게 아들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다. 『원 아들놈 얼굴 보는게 대통령 만나는 것보다 더 힘드니. 당신은 아예 자식을 대기업에 보내지 마시오.』 그 말 속에 보고 싶은 아들을 자주 못보는 아쉬움과 그렇게 바쁘게 만드는 회사에 대한 원망이 짙게 느껴진다.수년전 사내에서 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최상무는 부인을 잃었다. 암 진단은 받았지만 조기에 발견했고 수술이 잘 됐다는 의사의 말을 너무 믿었던게 화근이었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 체크해 봐야 했지만 그것을 게을리하다 암이 퍼진 것을 발견못했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부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챙겨야 했지만 바쁜 회사일 때문에 그러질 못했던 것이다. 그 일로 그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몇년이 지난 지금 그도 의사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과로하지 말고 운동을 하라는 충고를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제쳐두고 회사일에 전력투구하고 있다.이 세상에 한가지 일만을 하도록 허락된 사람은 갓난 아기뿐이다. 그외에는 좋든 싫든 여러 가지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부모, 배우자, 자식, 삼촌 또는 숙모, 친구, 이웃, 팀리더…. 많은 사람들이 이 역할 사이의 균형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만 모든 역할을 다 잘 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회사일에 목숨을 걸다 집안에서는 잊혀진 존재가 된 사람이나 십년 이상 동창 모임에 얼굴을 안내밀어 아예 제명되다시피한 사람들은 한 가지 역할에 과도한 힘을 쏟느라 다른 역할엔 소홀해 역할의 균형이 깨진 경우다. 역할의 균형문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된 과제라 할 수 있다.얼마전 조사된 한국사회 불안의 3요소는 가정, 장래, 부패문제였다. 우리처럼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외국에서조차 부러워하는 나라에 무슨 가정문제가 있을까 의아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낙관할 일만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남자는 회사일에만, 나머지는 모두 여성몫이라는 의식이 깊었다. 그만큼 남자는 회사일에만 전념하고 가정은 나 몰라라했던 게 사실이었다. 휴렛패커드는 「가정과 일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는 회사로 유명하다. 회사일에만 힘을 쏟고 다른 일에 소홀한 것이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내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많은 역할을 우리들은 가지고 있다. 또 그 역할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생산성이 오르고 참 마음의 평화가 온다. 모두 자신의 나머지 역할을 뒤돌아 보고 그 역할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점검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