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성공 품목은 잉크젯프린터 … 경영합리화도 과감히 추진

새해들어 슈퍼 가전양판점들간의 판매경쟁이뜨거워지고 있다. 고객유인을 위해 정가의절반에도 못미치는 값에 파는 메다마(目玉눈알)상품을 중심으로 할인전쟁이 벌어지고있다. 가전분야의 대표적인 메다마상품은 삼성전자와 대우전자 등 한국의 상품이다. 신문에 끼워서 배달되는 치라시 광고에는 「삼성」과 「다커스」(대우의 수출브랜드)가약방의 감초격이다. 일본 업체로서는 후나이(船井)상품이 가장 흔하게 등장한다. 영어표기로는 「Funai」. 선착순 1~10명 정도에14인치 컬러TV 1대가 1만엔 이하에 판매되는게 보통이다. 3만~5만엔인 다른 제품에 비해엄청나게 싸다.후나이전기(電機)의 전략은 저가 판매로시장을 석권하는 것이다. 프린터의 경우 전량을, 영상기기의 경우 40%를 미국 유럽메이커에 OEM으로 싸게 공급하고 있다.값이 싸면 판매가 늘어나는게 상식이다. 문제는 이익을 남길 수 있느냐는 점이다. 가전부문에서 1999년 6월기에 8.7%의 연결영업이익을 올렸다. 대형가전업체인 마쓰시타전기(1999년3월기 기준)의 2.5%, 샤프의 2.1%,소니의 5.0%를 훨씬 앞지른다.이익뿐만이 아니다. 매출 또한 4기 연속으로증가했다. 지난해 2월에는 오사카증권거래소2부에 상장됐다. 주가는 공개이후 8개월만에4만7천엔으로 10배 가까이 뛰었다. 해외투자자들로부터 특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후나이가 저가전략으로 시장석권에 성공한대표적인 품목의 하나가 잉크젯프린터다. 음악용 테이프레코더와 VTR 등 AV(음향영상)기기로 닦은 메커트로닉스 기술을 활용, 5년전부터 잉크젯프린터의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미국의 프린터 전문메이커인 렉스마크인터내셔널과 손을 잡고 중국 광동성 중산(中山)공장에서 저가 프린터 대량생산에 들어갔다.렉스마크는 1991년에 미국 IBM으로부터 독립했다. 레이저프린터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잉크젯프린터에서는후발기업이었다. 그러나 1997년6월 렉스마크가 판매한 후나이제 프린터 1호기 「1100」이 시장판도를 흔들어놓고 말았다.미국의 프린터 시장은 실용적인 저가 기종이주류다. 기본 성능에 큰 차이가 없으면 싼것이 잘 팔린다. 「1100」의 대히트로 렉스마크의 세계 잉크젯프린터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10%로 급상승했다. 올들어서는15%에 이르고 있다.경쟁기업들이 후나이에 맞서 저가의 신기종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렉스마크는 가격을더 내리면서 시장을 넓혔다. 「1100」의 후속모델인 「Z11」의 최저가는 현재 50달러이하로 까지 떨어졌다.잉크젯프린터 사업은 프린터 본체와 교환용잉크카트리지 등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형 3사는 두가지를 동시에 생산하고있다. 본체에서는 이익을 내지 못한다. 대신잉크카트리지를 구입하면서 최종이익을 확보한다. 그러나 후나이는 프린터 본체만 생산한다. 잉크카트리지 생산은 렉스마크가 맡는다.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이 바로 해외생산을 통한 미국시장 공략이다. 생산비가 싼 중국이나 말레이시아에서 전체의90%를 집중 생산한다.후나이는 이같은 독특한 생산체제로 시장을석권했다. 국내 공장은 축소한다. 해외 공장도 가장 코스트가 싼 곳으로 이전시킨다. 이익이 적은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한다. 독자적인 생산성 향상프로그램을마련,실시한다.그외에도 성공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있다. 바로 창업주의 강력한 리더십이다. 『수출전문 기업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너경영으로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왔기 때문이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닛산자동차의 리스트럭처링안보다 더 강한 개혁을 이미 20년이상 실시해 왔다.』창업주인 후나이 데쓰로사장은 이같이 단언한다. 후나이의 역사는 실제로 시행착오와실패의 연속이었다. 후나이가 창업된 것은 1961년. 처음에는 카세트플레이어와 오디오를미국에 수출, 순항을 거듭했다.그러나 1971년 미국 대통령 닉슨독트린으로인한 엔고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후에도 엔고로 계속 곤욕을 치렀다. 플라자 합의후인1987년에는 국내시장에도 참여했다. 자동제빵기의 히트와 저가 수입제품의 붐을 타고한때 급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버블이 붕괴되면서 판매실적이 나빠졌다. 잇따라 내놓은 백색가전도 빛을 보지 못했다.◆ 인건비 저렴한 해외로 공장 이전해외쪽도 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VTR이 덤핑과세 대상으로 지정됐다. 1992년에는 영국공장이 폐쇄됐다. 미국 시장도 위축됐다. 이로인해 1992년6월기의 매출은 전기에 비해 25%나 줄어들었다. 경상이익 또한85%나 급감했다.이같은 위기에서 탈출하게한 장본인이 바로후나이사장이다. 그는 주력상품의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겼다. VTR와 VTR일체형TV를 중국의 동완(東莞)공장과 말레이시아공장에서 각각 집중 생산했다. 국내 공장은 대폭감축했다. 싱가포르와 대만공장은 폐쇄했다.1995년까지 에어컨을 제외한 백색가전에서손을 뗐다. 중국의 중산공장을 잉크젯프린터공장으로 전환했다. 해외거점의 재편은 가혹했다. 1967년에 진출한 대만공장의 경우 한때 3천5백명에 이르렀던 종업원을 전원 정리했다. 중국 무석(無錫)의 합작회사를 1996년에 설립된지 2년만에 자본금을 포기하고손을 뗐다. 1994년6월부터 5년 동안 해외 자회사 등의 청산에 따른 특별손실이 1백51억엔에 이르렀다.이러한 과정에서 생산성 향상과 코스트절감의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 이를 집대성한게「후나이 프로덕션 시스템(FPS)」이다. 후나이사장은 1970년대 중반 간부사원들을 도요타 자동차공장에서 3개월간 연수를 시켰다. FPS는 자재재고 관리방식인 도요타의 「간반방식」을 개량한 생산성향상 프로그램이다. 일상업무에서 나타난 문제를 지속적으로개선, 품질향상과 코스트를 절감하는 것이다.FPS를 실시하고 있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중국의 후나이공장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수없는 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생산라인 근무자 앞에는 6개의 보턴이 달린 스위치박스가있다. 이들의 머리위에는 빨간램프가 있다.생산라인의 끝에는 당일 생산목표와 현재 생산대수를 표시하는 디지털게시판이 있다. 그옆에 아날로그식 시계가 걸려 있다. 이들 장치를 통해 어떤 라인의 어떤 공정에서 어떤문제가 일어났는가, 이로써 생산은 몇분 몇초간 중단됐는가를 즉각 알아낸다. 문제점을반드시 확인한 다음 문제를 반복해서 개선,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후나이는 FPS 정착 구조조정 완료 미국의 호경기로 호조를 지속하고 있다. 과제는 지난15년간 후나이를 떠받쳐온 VHS 방식의 VTR가녹화 가능한 DVD나 디지털VTR 등으로 대체될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후나이사장이 VTR 대체 상품으로 무엇을 내놓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