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가 사상 최고액 배상하고 경영구조 혁신까지 당해

글로벌 스탠더드의 발상지인 뉴욕 맨해턴의월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세계 최대의 뉴스 메이커다. 상장 업체가 지난 11월말 현재 3천42개사에 달한다.이중 3백82개사는 외국 회사다. 시가총액은11조8천억달러. 도쿄(3조3천억), 런던(2조6천억), 프랑크푸르트(1조2천억) 등 주요 증시의 총액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이처럼 거대한 시장을 거래소나 감독 당국의관리 능력만으로는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렵다. 시장 참여자들에 의한 자율적이고 공정한 게임 법칙을 통용시키는 것이 최선이다.기업 경영 정보를 투명화한다는 등의 글로벌스탠더드가 월가에서 형성된 것은 자연스런현상이었던 셈이다.하지만 가지가 많은 나무에는 바람 잘 날이없는 법이다. 상장 기업이 3천개가 넘는 뉴욕증시에서는 크고 작은 스캔들이 끊임없이일어난다. 거래소 딜러들의 주가 조작 시비에서부터 펀드 매니저와 브로커들간에 거액의 리베이트 거래가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뉴스가 잊을만하면 터져 나온다. 때로는 회계 보고서의 신뢰성과 관련해 월가의 대형회계법인들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하지만 월가를 최소한 다른 나라의 증권가와구분짓는 것이 한가지 있다. 부정이 드러나면 확실하게 응징을 받는다는 점이다. 적당히 부풀린 기업공시나 가공 수치를 집어 넣은 경영 보고서, 이런 것을 알고도 모른채적정 의견을 서슴없이 써넣어 선의의 투자자들을 기만하는 회계법인 등의 행태는 결코용서받지 못한다.최근 관광 지주회사인 센던트사와 유력 회계법인인 언스트 앤드 영(E&Y)사가 부정 공시(公示) 혐의로 투자자들에게 거액을 손해 배상하게 된 사건은 월가의 이런 자정(自淨)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신문들은최근 센던트사가 투자자들에게 28억달러를배상키로 한데 이어, E&Y도 별도로 3억3천5백만달러를 물어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라마다 인 호텔과아비스 렌터카 센터의 지주 회사인 센던트사는 97년말 통신판매회사였던 CUC 인터내셔널사를 흡수 합병했다. 센던트는 합병 후 CUC인터내셔널사의 회계 보고서를 자체 감사하는 과정에서 이 회사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 이익을 6억4천만달러나 과대 계상해 공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CUC 경영진이 이익을 실제보다 부풀려 경영 보고서를 꾸민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센던트사와의 합병 협상에서 CUC의 값을 최대한올려받기 위해서였다.◆ 소송맡은 변호사들도 특수 누려센던트의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주당 35달러를 오르내렸던 것이 졸지에 19달러로까지 떨어졌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쪽은 센던트사 자신이었다. 주가 폭락으로 인한 자산 손실 규모가 1백44억달러에 달했다.그렇지만 이 정도의 불운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대형 기관투자가들에 의한 주주대표소송(class action)에 휘말렸다. 뉴욕주와뉴욕시, 캘리포니아주의 공무원 연금기금 등대형 투자자들이 센던트사의 주가 하락으로입은 막대한 손실을 배상하라며 소송을 걸었다.CUC 인터내셔널을 승계한 센던트사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투자자들에게 28억달러를 배상한다는데 합의하는 것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투자자들은 배상금을 받을 경우 주가 하락으로인한 손실분의 40~60%를 만회하게 될 것으로알려졌다. 이같은 합의로 정작 재미를 본 사람들은 따로 있다. 투자자측의 변호를 맡은법률회사다. 법률회사측은 정확한 수임료에대해 아직 확정된 게 없다며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이번 소송에 정통한 소식통들에따르면 법률회사측은 배상금액의 15%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이번 한 건으로 4억2천만달러를 챙기게 된 것이다.센던트사가 부정 공시의 대가로 물어내게 된배상금 28억달러는 미국 증권가 사상 최고액이다. 종전 기록은 지난 94년 프루덴셜 증권사가 비슷한 사유로 투자자들에게 지급한 15억달러였다. 센던트는 졸지에 이전의 최고배상금액의 두배 가까이를 물어내는 불명예스러운 신기록을 수립했다.그러나 CUC의 죄업으로 인해 지게 된 멍에는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투자자들은 화해의조건으로 배상금 외에 경영 구조를 쇄신토록요구했다. 회사 임직원들의 경영 전횡을 예방할 수 있게끔 이사회 제도를 합리화하는한편 임원들에게 유리한 방향의 스톡 옵션제도도 뜯어 고치도록 했다. 센던트는 이들요구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우선 이사회 구성원의 과반수 이상을 독립적인 사외 이사로 구성키로 했다. 회계감사도독립적인 인사를 임명토록 했다. 이와 함께이사 전원의 임기를 1년으로 했다. 스톡 옵션의 편법 조항으로 논란이 야기됐던 재가격제도(repricing)도 금지시켰다. 리프라이싱이란 회사의 주가가 현저한 수준으로 하락했을 때에는 스톡 옵션에 의한 임원들의 자사주 매입 가격도 그에 상응해 낮춰 주는 방식이다.투자자들은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요구하는 공격의 화살을 센던트사에만 날리지 않았다. 당시 CUC 인터내셔널사의 회계 감사를맡았던 E&Y측에도 부실 공시를 방조함으로써주가를 하락케 한 책임을 지도록 요구했다.E&Y는 이에 대해 우리도 피해자라며 펄쩍 뛰었다. CUC측의 장부 조작 기술이 워낙 교묘해서 감사를 통해 허위 사실을 탐지해낼 수없었다는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E&Y의 명예가 훼손된 셈이므로 자신들도 선의의 피해자라고 강변했다. E&Y는 이를 배상하라며 센던트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그러나 투자자들의 준엄한 추궁 앞에서 이런발뺌은 통하지 않았다. 기업의 회계 장부를직업적으로 감사하려면 어떤 허위 사실도 적발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E&Y의 변명을 공허하게 만들었다.결국 E&Y는 투자자들에게 3억3천5백만달러를배상키로 합의했다. 이 액수 역시 회계법인이 감사 부실로 인해 투자자들에게 지급키로한 역대 배상금액 중 최고액으로 기록됐다.종전 기록은 지난 1992년 E&Y의 전신인 아더영 회계법인이 링컨S&L이라는 저축은행에 대한 회계 감사 부실에 책임을 지고 투자자들에게 물어줬던 6천3백만달러였다. E&Y의 배상액은 종전 기록을 5배 가까이 뛰어넘은 셈이다.E&Y가 이런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은 최근 회계업계에서 확산되고 있는 관행이 부른 자업자득이라는게 월가 사람들의 평가다. 이 회사를 비롯한 미국의 대형 회계법인들은 요즘인건비가 낮은 초임 회계사들을 대거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진을 높이겠다는 계산에서라고 한다.그럼에도 E&Y는 끝까지 자신들의 무죄 를 강변하고 있다. 투자자들에게 거액을 배상해주기로 한 것은 소송을 오래 끌면 불이익이 돌아오게 돼 있는 유감스런 미국의 법 현실 때문이지 잘못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E&Y는 이번 배상액 중 75% 가량은 보험회사로부터 보전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거나 E&Y로서는 마진 좀 높여보겠다고 대충회계 감사에 임했다가 단단히 혼쭐난 셈이다.월가에서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가지의 온갖뉴스가 터져 나오고 있지만,센던트 및 E&Y의 부실 공시에 대한 거액 배상 뉴스는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 화젯거리로 오르내리고있다. 월가의 자정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