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나 관공서가 제법 친절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생산자 위주로 돼 있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고객이야 이 창구에서 저 창구로 다니건 말건 자신들의 생산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산자 위주의 사고가 고객위주로 바뀌고 그것을 시스템으로 뒷받침할 수 있을 때 개선은 이뤄진다.수년전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 동사무소엘 간 적이 있다. 경위를 얘기하자 경찰서에 가서 분실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꽤 먼 거리에 위치한 경찰서엘 가 분실신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제출하려 하자 자신들은 양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그것은 동사무소 업무니 그곳에 가서 내라는 것이다. 그까짓 분실신고 하나 하는데 동사무소, 경찰서, 다시 동사무소를 왕복한 것이다. 이를 따지자 담당자는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글쎄, 우리도 문제라고는 생각하지만 개선이 쉽지 않네요』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그까짓게 어려울게 뭐있나. 분실신고서만 동사무소에 가져다 놓으면 되지. 그후 개선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당시 분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현금카드를 만들러 은행에 갔다. 번호표를 받아 기다리니까 카드는 카드계에서 해야 한단다. 그곳에 가서 신분증을 보이고 서류를 작성하는데 결제계좌의 통장 비밀번호를 변경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랬더니 비밀번호 변경은 다른 쪽에서 해야 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다른 쪽에 가서 기다려 또 신분증을 보이고 양식을 작성했다. 그나마 카드도 열흘이나 기다려야 나온단다.최근 그렇게 모진 풍파를 거쳤어도 은행은 별로 달라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나아진 것이라곤 예전의 뚱하던 모습이 사라진 정도다. 지금처럼 전산망이 발달된 시대에 카드를 만들면서 비밀번호 변경같은 기초적인 업무를 왜 구분해서 해야 하는지 내 머리론 이해가 안된다. 또 신규로 통장을 만들거나 수표로 돈을 찾을때는 창구직원 뒤에 있는 대리한테 도장을 받는데 내 눈엔 거의 보지도 않고 자동으로 도장을 찍는다. 모르긴 몰라도 창구 여직원은 하루에도 수십번은 뒤에 가서 도장을 받을 것이다. 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을바에야 아예 도장을 창구직원에게 주면 사무생산성이라도 오를텐데. 아직 우리의 은행업무는 원시성과 생산자 위주의 사고방식이 결합된 수준이란 생각이 들었다.15년 전 미국에 처음 가서 운전면허시험을 보고 발급받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필기시험에 붙자 실기시험 날짜를 같이 정하는 거다. 어느 날이 편하냐고 내게 묻는데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질 못했다. 일방적으로 정해진 날을 통보받는데 익숙한 나는 그런 힘센 기관에서 내 의견을 묻는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며칠 후 실기시험에 붙은 나는 집에 가서 한 열흘 기다리면 되리라 생각했다. 합격증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가자 작성할 것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은 친절한 직원이 이름,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 주소 등을 물으면서 직접 입력을 한다. 그런 다음 고정된 카메라 앞에 앉으란다. 컴퓨터에 찍힌 사진을 가리키면서 사진이 맘에 드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사진과 함께 운전면허증이 생산돼 나오는 것이다. 그때의 충격과 감격이란.공부 끝내고 미국에서 나와서 운전면허를 다시 살리는데 같은 곳엘 서너번 간 기억이 있다. 무슨 서류가 빠졌다, 아직 뭐가 안 나왔다, 확인이 안된다. 갖은 핑계를 대면서 발급이 안되는 거다. 세월이 지나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나는 아직도 동사무소, 경찰서, 관공서 등과 같은 창구있는 곳에 갈 일이 있으면 맘이 무겁다. 은행이나 관공서가 제법 친절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생산자 위주로 되어 있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고객이야 이 창구에서 저 창구로 다니건 말건 자신들의 생산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산자 위주의 사고가 고객위주로 바뀌고 그것을 시스템으로 뒷받침할 수 있을 때 개선은 이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