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외면으로 자금 조달길 막막 … 인원감축 등 살아남기 몸부림

‘돈독’에 빠져 흥청대던 인터넷 판매업체, 이테일러(e-tailer)들에 요즘 돈가뭄 비상이 걸렸다. 한정없는 물주로만 여겨졌던 투자자들이 인터넷 열풍으로부터 한발 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테일러들은 그동안 나스닥 등을 통해 몰려든 투자자들의 돈줄만을 믿고 마케팅 등에 거액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수의 투자자들이 언제 그랬냐 싶게 돈을 빼내면서 사정은 정반대로 달라졌다. 추가 투자는 커녕 존폐 여부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로 내몰리고 있다.비즈니스 세계의 신데렐라에서 졸지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인터넷 기업들은 한둘이 아니다. 한때 온라인 음반 판매 시장의 개척자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CD나우사는 최근 폐업 일보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의 과도한 광고비 지출 등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운데 투자자들의 외면에 따라 추가로 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 바비큐 소스에서부터 개인용 컴퓨터(PC)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품목을 취급하면서 ‘사이버 백화점’ 돌풍을 일으켰던 밸류 아메리카사도 비슷한 처지다. 이 회사는 자금난을 견디다 못해 인력을 절반으로 줄이고 취급 품목도 대폭 정리하는 자구 노력을 단행했다. 그럼에도 회계 전문가들은 이 회사가 얼마나 더 존속할 수 있을지 장담키 힘들다며 고개를 젓고 있다.이테일러들의 재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몇군데 회사의 주가 동향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가늠할 수 있다. 인터넷 완구 판매의 선구자로 각광받았던 이토이즈(EToys)사의 주가는 작년 10월 86달러까지 치솟았었다. 그러나 지난 4일의 종가는 단돈 7.5625달러. 반년도 안돼 10분의 1 이하로 오그라들었다. CD나우사의 주가도 작년 여름의 23.25달러에서 3.9688달러로 주저앉았다. 심지어 이테일러들의 간판 주자인 아마존 닷 컴의 주가도 지난 4일 기준으로 지난해 최고치(112.375달러)의 절반 수준인 63.9375달러로 내려앉은 상태다.◆ 신데렐라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동안 ‘인터넷’이라는 접두사만으로도 거액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투자자들이 ‘거품’의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선별 투자’로 패턴을 바꾸기 시작한 결과다. 월가 전문가들은 이같은 투자 조정 국면이 상당기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투자자들이 인터넷 기업들간의 옥석을 가리기 시작한 이상 ‘함량 미달’로 판명난 기업들은 대부분 도산이 불가피해졌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실리콘 밸리의 소프트웨어 업체 어도브 시스템즈사의 존 워넉 사장 같은 사람은 “수만개에 달하는 이테일러들 중에서 궁극적으로 살아남는 기업은 한 줌에 불과할 것”이라고까지 예상하고 있다.해당 기업들이 느끼는 위기 의식은 보다 절박하다. 최근 월가의 간판 증권회사 골드만 삭스사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주최한 제1차 이테일링 세미나에서는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이 돼 있더라”는 식의 하소연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월가에서는 향후 이테일러들의 생존 가능성 여부는 누가 얼마만큼의 자금을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갈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그동안 투자자들의 러시에 힘입어 충분한 자금을 비축해 둔 아마존 닷 컴이나 온라인 식품업체 웹밴 등은 ‘북풍한설’을 이겨낼 체력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나머지 이테일러들은 악전고투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예컨대 아마존 닷 컴이 흑자 기조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5억달러 정도를 추가 투자해야 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지만, 이 회사가 은행 계좌에 넣어둔 현금만도 10억달러는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웹밴사의 경우도 지난 1월 현재 6억3천7백만달러의 현찰을 쥐고 있다. 이 돈이면 샌프란시스코에 거점을 둔 이 회사가 계획한대로 애틀랜타와 시애틀, 시카고 등으로 영업망을 넓혀 장기 존립 기반을 다져나가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고 있다.하지만 이처럼 자금 사정이 넉넉한 이테일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기업들은 당장 몇 달을 버티기도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테일러들을 더욱 난감하게 하는 것은 완전 경쟁에 노출돼 있는 인터넷 판매시장의 특성상 지속적인 가격 인하 등 소비자들에 대한 유인책이 없이는 생존이 힘들게 돼 있다는 점이다.이테일러들의 협의체인 숍 오그(Shop. org)에 따르면 온라인 소매를 제공하는 웹 사이트의 수는 현재 3만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 연간 매출이 50만달러를 넘는 업체는 단 1천여개사에 불과하다. 철저히 ‘구매자 시장(buyers’ market)’일 수밖에 없는 이테일링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소비자들의 입맛에 최대한 맞는 서비스와 가격을 제공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테일링업체들이 대부분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엄청난 규모의 마케팅 투자를 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테일러들은 그동안 소비자들에 대한 ‘존재 알리기’를 위해 거액의 비용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 신문과 잡지, 방송 등 ‘올드 미디어’들을 빌려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펴는 것을 비롯해 보다 신속하고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물류 센터를 짓고, 서비스 요원을 확충하는 등의 투자에 나섰다. 그 결과 기업들의 비용 지출은 매출에 비해 ‘배보다 배꼽이 훨씬 큰 격’이 됐다. 페츠 닷 컴(Pets.com)사의 경우 작년 4/4분기 중 마케팅에 쓴 비용이 매출의 여섯배 가까운 3천70만달러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투자자들을 경악케 하기도 했다. 온라인 귀금속 판매업체인 애쉬포드(Ashford.com)사는 올 회계연도의 적자 추정 규모가 당초 예상치(3천7백만달러)의 두배 수준인 6천4백만달러에 달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대규모 광고 공세로 비용이 큰 폭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게 그 이유다.전문가들은 이테일러들의 광고 등 마케팅 경쟁이 ‘치열함’을 넘어서 ‘제살깎기’의 단계로까지 비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온라인 의류 소매업체인 스타일클릭(StyleClick. com)사의 모리치오 제치오네 사장은 이테일러들이 ‘한번 찾아와 평균 35달러 어치를 구매하고는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인’ 고객 한 사람을 붙잡기 위해 지출하는 광고 비용이 소비자 1인당 45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어림잡고 있다. 그나마 이 정도는 보수적인 추산이고 이테일러들의 고객 1인당 지출 비용이 최대 2백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과도한 광고비 지출 등 제살깎기가 화근이테일러들의 ‘제살깎기’는 과도한 광고 경쟁에만 그치지 않는다.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연중 무휴이다시피 ‘바겐 세일’을 실시하기 일쑤다. 웹 조사기관인 주피터 커뮤니케이션즈사에 따르면 인터넷 판매업계의 93%가 현재 할인 판매를 실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결혼용품 업체인 델라(Della.com)사는 1백달러 어치를 구매하는 고객에게 온천 입장료를 50달러 할인해주는 쿠폰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웹밴사는 최근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15달러짜리 할인 쿠폰을 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테일러들간의 이런 경쟁은 ‘소비자들의 버릇만 망치는’ 결과로 이어지기 일쑤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꼭 사야 할 물건까지도 할인 경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구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비자들이 계산해야 할 상품 우송비용까지도 이테일러들이 경쟁적으로 부담하는 바람에 비용구조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문제는 수많은 이테일러들이 너나없이 이런 ‘특단’의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제공하고 있어 ‘존재 알리기’라는 소기의 효과가 별로 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난해 추수감사절(11월25일)부터 올 2월의 프로 미식축구 슈퍼보울 결승전 기간까지 인터넷 업체들이 쏟아부은 광고비는 줄잡아 2억~3억달러로 추산된다. 그러나 같은 아이템을 놓고 4~5개의 업체들이 광고 맞불작전을 편 바람에 대다수 소비자들은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결과로 끝났다고 광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지금까지 이런 제살깎기식 과당 경쟁이 가능했던 것은 나스닥을 비롯한 증권가에서 인터넷 붐이 지속됐던 덕분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이성을 되찾고 옥석을 가리기 시작한 지금, 더 이상의 무분별한 출혈 경쟁은 불가능해졌다. 인터넷 기업들에 춘삼월 호시절은 지나가고 ‘누울 자리보고 발을 뻗어야 하는’ 냉엄한 현실이 찾아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