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자금력·조직력 활용 … 예산 집행·인력충원 독자 운영하는 ‘별동대’

덩치 큰 걸 자랑으로 여겼던 대기업에 최근 세포분열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사내 벤처 설립 붐이다. 사내 벤처는 몸은 대기업에 속해 있으면서 인력과 예산, 사업 집행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별동대와 같은 조직이다. 대기업의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지원받을 수 있고 벤처기업처럼 유연한 사고와 순발력있는 대응이 가능한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우성형질만을 추출한 것이 사내 벤처인 셈이다.이런 흐름을 주도하듯 최근 SK주식회사가 연말까지 1천억원을 들여 사내 벤처팀을 구성하겠다고 밝힌데 이어 삼성SDS가 연말까지 5백억원을 투입, 20개의 사내 벤처팀을 출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LG-EDS도 벤처사업 공모에서 채택된 직원에게 사업 비용의 80%를 대주겠다고 약속했다.한솔엠닷컴 또한 사내 벤처팀에 독립하기 전까지 자금을 지원해주고 실패해도 다시 회사로 돌아올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는 대기업의 벤처 바람은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사내 벤처팀의 사무실은 절대 본사 사옥 내에 있지 않다는 것.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서는 딱딱하고 정형화된 사무실보다는 누워서 잘 수도 있고 음악도 ‘빵빵’하게 들을 수 있는 색다른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 내는 색다른 공간 ‘특징’둘째, 팀장은 사장처럼 예산 집행부터 인력 충원까지 독자적인 권한을 갖는다. 팀장은 주로 대리나 과장급이 맡는다. 예전같으면 중간관리자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엄청난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는 셈이다. 한 달에도 수억원의 사업자금을 집행해야 하고 필요한 인력도 직접 뽑아야 한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부담감도 있지만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SK주식회사에서 게임사이트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게임오케이(GameOK)의 이장근 팀장은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고 매출 계획이나 회계 등을 독자적으로 운영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기회”라고 말한다.셋째, 사내 벤처는 대기업의 자금력과 조직력을 활용할 수 있다. 아이디어는 있지만 오프라인 조직이 없어 고생하는 벤처기업과는 달리 사내 벤처는 본사로부터 여러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LG-EDS의 홍보팀 김여영 본부장은 “벤처사업부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사무실 임대 비용뿐 아니라 인건비, 회사 네트워크 사용비용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언제든지 벤처로 도전하라 격려넷째, 실패해도 페널티(Penalty)는 없다. 엄격한 심사를 통해 사내 벤처로 선발된 이상 집행은 거침없이 해야 일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대기업들은 “실패했을 경우 다시 예전의 일자리로 돌아가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투자비 회수도 어려울 뿐더러 감가상각비로 처리할 경우 회사에 부담이 적어 사내 벤처팀을 독려하고 있다. 한솔엠닷컴도 임직원들에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만 있으면 언제든지 벤처로 도전하라. 실패해도 괜찮다”며 격려하고 있다.사내 벤처가 갖고 있는 한계도 있다. 사업 범위에 제약을 받아 다른 기업을 상대로 영업을 확장할 수 없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내 벤처는 끊임없이 본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분사를 꿈꾸고 있다.대기업 사내 벤처의 K팀장은 “독립경영을 보장하는 의미에서 본사는 지분의 30% 이상을 출자하지 않았고 도움도 많이 준다. 그러나 한 기업에 속해 있어 다른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할 수 없는 약점이 있어 분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사내 벤처팀들이 모기업의 젖줄을 양분으로 완전히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을 받는 흐름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벤처기업으로 탈출하려는 직원들의 욕구를 풀어주고 사업이 성공할 경우 출자한 대기업도 덩달아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 이창용 LG텔레콤 카이팀 팀장제대로 한번 해보자 ‘과감히 탈출’“성공하면 억대 연봉을 받고, 실패하면 무보수로 몇년간 일하겠다.”LG 텔레콤 카이팀 이창용 팀장(32, 아래 사진)이 ‘모 아니면 도’라는 과감한 발언을 사장에게 한 때는 지난해 12월초. 듣고 있던 LG텔레콤 남용 사장(52)은 황당했지만 새파란 후배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실패해도 페널티는 없다. 제대로 한번 해봐라.”이렇게 해서 출범한 LG텔레콤의 카이팀은 예산, 인력은 물론 사무실도 따로 사용하고 있다. 카이란 LG텔레콤의 무선인터넷 사업을 대표하는 브랜드. 카이팀은 무선인터넷 사업을 전략적으로 키워내는 마케팅 조직이다. 수학기호에서 무한대를 표시하는 카이(∞)를 대표 브랜드로 택한 이유는 무한대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에서다.카이팀은 LG텔레콤이 있는 강남 사옥을 떠나 퓨전(Fusion)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얻었다. 이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엔 딱딱한 테이블이 없다. 대신 신발을 벗고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원탁이 있고, 언제든지 영상자료를 볼 수 있도록 대형 스크린이 놓여 있다. 사무실에만 있어도 아이디어가 솔솔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당초 이팀장과 뜻을 같이 한 LG텔레콤 직원은 6명. LG텔레콤이 갖고 있는 거대한 인프라에 비해 소비자들에겐 3위 정도만 하는 애매한 기업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누군가 사건을 저지르지 않으면 만년 3위에 머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카이팀. 요금이나 신기술 위주의 마케팅보다 문화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대표 브랜드를 만들기로 했던 것. 담당 상무에겐 일괄 사표를 제출한 다음이었다.비장한 각오를 갖고 일하겠다는 이들의 의지에 감복한 경영진은 출범부터 수억원의 운영자금을 지원했다. 남사장은 “출범한 지 1개월만에 사업계획서, 마케팅 전략, 매출계획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내 벤처 형태가 아니고는 불가능했다”고 평가했다.이팀장은 “완벽한 전략보다는 부족하더라도 발빠른 대응이 중요하다. 카이팀의 순발력과 본사의 조직력, 자금력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