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 포장 기업” “멀쩡한 기업 날벼락” 공격·방어 따라 ‘주가 출렁’ …'누가 최후 승자' 관심 고조

"증시의 염라대왕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요즘 월가에서는 간판 공매(空賣) 투자자와 의사 출신 기업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혈투(血鬪)’가 화제다. 주인공은 공매 전문회사인 아센시오 & 컴퍼니사의 마누엘 아센시오사장과 생명공학 기업인 헤미스퍽스사의 윌리엄 카터사장. 헤미스퍽스사가 지난 80년대 중반 만성 피로증후군(CFS)과 에이즈 등의 고질병에 특효가 있다는 주장과 함께 ‘암플리젠(Ampligen)’이라는 이름의 의약품을 내놓으면서 두 사람의 악연은 시작됐다.암플리젠이 시판에 들어간 뒤에도 10여년 동안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헤미스퍽스사의 주가가 지난 98년 중반부터 돌연 치솟기 시작하자 공매 투자자인 아센시오는 “암플리젠의 약효가 허위 과장됐기 때문이며 헤미스퍽스사의 주가 거품은 곧 꺼지고 말 것”이라며 대대적인 공매에 나섰다. 졸지에 ‘사기꾼’으로 몰리게 된 카터사장이 필사적인 반격을 개시하면서 끝없는 혈투가 시작됐다. 둘 사이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에 따라 헤미스퍽스사의 주가도 올랐다가는 뚝 떨어지고, 다시 올라가는 등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아센시오가 부정한 방법으로 떼돈을 벌기 위해 멀쩡한 기업을 말아먹고 있다”는 카터사장의 주장과 “허위와 과장으로 투자자를 현혹시키는 사이비 기업인을 모든 투자자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며 전의(戰意)를 꺾지 않고 있는 아센시오사장 가운데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이들이 벌이고 있는 ‘세기의 전쟁’을 관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매의 메커니즘과 그것이 월가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쇼트셀링(short-selling)’으로도 불리는 공매란 한마디로 일반 주식 투자와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정상적인 보통의 주식 투자는 특정 주식의 값이 앞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그 주식을 매입, 주가가 일정하게 상승한 시점에서 처분해 차익을 챙기는 메커니즘이다.◆ 공매, 주가 급락 예상 미리 주식 팔아쇼트셀링은 이와 정반대로 특정 주식의 주가가 과대 평가돼 있어 멀지않아 내려앉을 것으로 예상, 그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주식을 빌려 팔아치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주가가 떨어지면 싼 값에 주식을 사 현물로 갚고는 차익을 챙기는 것이다.하지만 쇼트셀링은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투자 기법 중의 하나다. ‘상장 기업들의 염라대왕’이라는 듣기에 좋지 않은 별명으로 불림에도 상당수 공매 투자자(쇼트셀러)들은 어엿한 ‘투자 전문가’로 내놓고 활동을 펼친다. 쇼트셀링의 창시자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친인 조셉 케네디이다. 1920년대에 월가를 주름잡았던 그는 “과대 포장된 주식을 가려내 공매를 하면 목돈을 벌 수 있을 것”임을 간파하고는 쇼트셀링 기법을 개발했다.조셉 케네디가 20세기의 전반부를 풍미했다면 아센시오는 20세기 후반부와 2000년대의 초입에 걸친 대표적 쇼트셀러다. 당당하게 홈 페이지(www.asensio.com)까지 개설해 ‘주식 매도 추천 종목’의 리스트까지 띄워놓아 적잖은 상장 기업들의 복장을 질러대는 그는 월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과학적 투자의 달인’으로 통한다. 그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쇼트셀링 대상 종목을 분석해 투자에 옮기는지는 최근 몇해 동안 그가 기록한 투자 성적이 입증한다. 미국 증시에서 주가가 절정의 상승가도를 달렸던 97년과 98년에 그는 6백만달러 이상의 투자 수익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일반적으로 주가 상승기에는 쇼트셀링을 하기가 어렵게 마련이다. 개별 재료가 시원치 않은 종목이라도 ‘대세’를 타고 상승 행렬에 동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97년 이후 많은 쇼트셀러들이 인터넷과 바이오 등 분야의 첨단 주식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매에 나섰으나 대부분이 여지없는 참패로 귀결됐다. 쇼트셀러들은 아메리카 온라인(AOL)을 비롯해 루슨트 테크놀로지, IBM, 컴팩, 보다폰 등 첨단 우량주들이 단기간에 너무 급등한 것으로 판단하고 공매의 표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주가가 내려앉기는 커녕 천정부지의 상승 행진을 몇년 동안이나 계속했다.쇼트셀링은 또 정상적인 투자와 달리 무제한적인 손실을 입을 수도 있는, 상당히 위험도가 높은 투자 기법이다. 정상적인 투자의 경우는 아무리 운이 나쁘다 해도 최악의 경우 투자 원금을 1백% 날리면 그뿐이다. 하지만 쇼트셀링의 경우는 이론상 손실률이 1천%, 또는 그 이상에 이를 수도 있다. 어떤 주식이 곧 하락할 것으로 보고 주당 10달러에 외상 구매한 뒤 처분했는데, 그 주가가 떨어지기는 커녕 1백달러 이상 뛰어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큰 위험을 안고 투자에 나서는 쇼트셀러들은 자신들이 리스크를 무릅쓰고 공매에 나섬으로써 증시의 지나친 거품을 사전에 예방하는 순기능을 맡고 있다고 자부한다. 아센시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직업은 하늘이 증시에서 선과 악을 가려내도록 맡기신 거룩한 소명”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반면 당하는 쪽에서 보면 이들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내리는’ 존재다.아센시오와 카터의 ‘잘못된 만남’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이야기의 발단은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문 듀크대 의대와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원을 졸업한 의사 출신의 카터는 헤미스퍽스라는 제약회사를 설립해 ‘암플리젠’이라는 약품을 개발해냈다. CFS는 물론 에이즈와 B형 간염, 각종 암 세포 등을 치료하는데 획기적인 효험이 있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식품의약국(FDA)에 효능 인증을 신청했지만 최종 확인을 받지 못한채 십수년을 보내야 했다.그러던 차에 98년7월, 미국 최고의 인기 TV 토크 쇼 프로그램인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인기 사회자인 윈프리가 “CFS 등에 효능이 있는 약품이 있다더라”며 암플리젠을 선전하는 듯한 얘기를 하면서 헤미스퍽스의 주가에 날개가 돋치기 시작했다.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아센시오는 “헤미스퍽스의 갑작스런 주가 급등에는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있다”고 짐작하고는 윈프리에게 “무슨 근거로 암플리젠의 나팔수를 맡았느냐”고 추궁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쇼트셀링을 시작한다.이어 자신의 웹 사이트에 “암플리젠은 FDA 등의 인증을 받지 못했으며, 의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치가 없는 물품”이라는 자료를 띄우고는 ‘강력한 매도 추천 종목’으로 올리기에 이른다. 그러자 카터는 즉각 반박 기자회견을 열고는 “암플리젠을 투약한 환자들 중 상당수가 현저한 차도를 보였다”고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SEC의 레빗 위원장이 헤미스퍽스의 주장이 투자자들을 현혹시킬 소지가 있다며 공식 조사에 나서면서 두 사람간의 싸움은 일진일퇴의 혼전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주가 내리려는 ‘악의 화신’ 악명도아센시오의 공격과 뒤이은 SEC의 ‘지원 사격’으로 헤미스퍽스의 주가는 한때 4달러선으로 곤두박질쳤지만, 카터사장은 이로 인한 곤경에 굴복하지 않고 약효를 인증받아 ‘명예’를 회복하는데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섰다. 최근 FDA에 CFS는 물론 에이즈 치료 실험이 성공적이었다는 내용의 인증 신청서를 재차 제출하고,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면서 헤미스퍽스의 주가는 19달러선으로까지 치솟았다.아센시오는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며 암플리젠의 허구성이 멀지 않아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라며 전의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월가의 간판 쇼트셀러로 군림해 온 아센시오의 ‘과학적 공매’가 이번에도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약품의 효능을 반드시 입증해 냄으로써 공매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말겠다’는 의사 출신 기업인의 ‘자존심’이 이길 것인가. 두 사람 사이의 ‘전쟁’에 쏠리는 월가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