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에 사무실을 차리고 장학사업을 준비중인 이모씨(65). 2년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현금화했다. 세금 등을 모두 치르고 나서 손에 쥔 돈은 약 17억원.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 회원권 분양업체 등에서 예금이나 회원권 구입을 권하는 전화가 오고, 국내외 자동차업체들의 차량구입을 부탁하는 편지와 고급스런 잡지 등으로 우편함이 차기 시작했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더니, 사람대접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게 이씨의 말이다. 물론 돈이 생기자마자 꼭 집어 영업을 하는 업체들의 수완에 약간의 놀라움을 갖게 된 것은 이씨의 또 다른 기억이다.이씨가 놀라움을 느꼈다는 기업체들의 이러한 마케팅이 바로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VIP마케팅’이다. 마케팅의 볼륨세그멘테이션상 고액자산을 가진 상류층을 끌어들이는 한 방법으로 소개되는 마케팅기법이다. ‘귀족마케팅’ 또는 ‘프리스티지마케팅’(prestige marketing), ‘중요고객마케팅’(frequency marketing) 등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VIP마케팅을 가리키는 말은 달라도 한가지 일치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액자산가들을 겨냥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가장 큰 볼륨을 형성하는 중산층이나 일반인들은 예외라는 것이다.VIP마케팅에서 타깃으로 설정된 상류층을 경영학자들은 직업 소득원천 주택유형 주거지역 등으로 구분했을 때 최상위 계층으로 전체 국민의 2% 미만으로 본다. 이는 다시 세습에 의한 부를 누리거나 명문가의 자손들인 최상류층(upper-uppers)과 자수성가한 상류층(lower-uppers)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는 외국의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류층을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조사도 잘 응하지 않을 정도로 노출을 꺼리기 때문에 자료축적이나 조사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제일기획 브랜드컨설팅그룹 김익태 국장의 말이다.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상류층을 구분할 때 보통 통계청의 소득별 계층구분이나 한국은행에서 집계하는 은행수신액에 따라 파악하려 시도한다. 통계청에서는 소득을 기준으로 5계층으로 구분하며 전체 가구의 상위 20%를 가장 소득이 높은 계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전체 1천3백만가구의 20%인 2백60만가구가 해당되며, 이들의 가구당 평균 소득은 올 2/4분기말 기준으로 월 4백74만6천원이다.그러나 마케터들은 통계청의 자료를 인용할 경우 상류층수가 너무 많고 소득단위도 상류층이라고 하기에는 작다는 등의 이유로 전체가구 가운데 최상위 5% 정도인 6만5천가구 정도를 상류층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행자료를 이용할 경우는 현금자산기준으로 5억원 이상의 거액계좌(저축성예금·금전신탁·CD 포함)가 인용된다. 지난 6월말 기준으로 9만계좌에 이르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만계좌 정도가 늘어났다. 그러나 한 가족이 여러 계좌를 가진 경우도 있어 9만명 모두를 상류층으로 보기에는 무리다. 그런 점에서 “업계에서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는 약 3만∼10만명이 상류층에 해당한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 마케팅 전문가들의 시각이다.상류층을 나누는 잣대가 부유함의 정도인만큼 이들을 대상으로 한 VIP마케팅은 한정된다. 수입자동차업계, 고급주택이나 레저시설을 분양하는 건설·리조트업계, 백화점의 고급매장이나 수입명품업체 등 고가의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거나 이들의 자산을 유치하려는 금융기관 등이다.실제로 이런 업체들은 상류층을 모시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필사적으로 펼치고 있다. 최근 롯데건설 등 몇몇 건설업체들은 광고에 노골적으로 ‘귀족’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상류층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신세계백화점의 경우 연간 1천만원 이상을 구매하고 연체가 없는 회원을 최고의 VIP로 특별관리하기도 한다. 고가의 차량을 판매하는 수입차업체들도 상류층을 유인하기 위해 경쟁적이다. 기존고객은 물론 구매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잠재고객 명단을 갖고 DM발송이나 이벤트 등을 마련해 판매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약 5만명정도의 잠재고객명단을 갖고 있다”는 한 수입자동차업체의 사장은 “DM발송처럼 직접적인 접근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도 있어 상당히 신중하게 VIP마케팅을 전개한다”고 말했다. 은행 증권 투신 신용카드업체 등 금융기관들도 별도의 전담팀을 구성, VIP회원 유치와 특별관리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이처럼 상류층을 겨냥한 VIP마케팅이 붐을 이루는 배경에 대한 마케팅 전문가들의 진단은 간단하다. 상류층의 지갑 한번 열리는 것이 다른 여러 사람들의 지갑이 열릴 때보다 규모가 크다는 것이다. ‘20대80 법칙’으로 불리는 파레토(Pareto)의 원리 즉 ‘기업 매출액의 80%는 20%의 고객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경험법칙이 거론되기도 한다. 한 신용카드사 직원은 “VIP회원의 경우 연간 신용카드 사용액이 4천만원 이상으로 그 가운데는 억대사용자도 적잖다”고 귀띔했다.감성적인 소비성향이 강해 브랜드충성도가 높고, 이탈률이 적은 상류층의 특성도 VIP마케팅의 확산에 한몫을 한다. 적은 투입비용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쇼메의 한 임원은 “일단 한번 구입하고 난 고객은 이탈률이 적어 브랜드이미지 관리와 기존 고객관리에 주로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상류층의 소비성향은)준거집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한국방송광고공사 신정신 연구위원의 말이다. 즉 동류의식이 강한 같은 상류층이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함께 누리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시장확대를 염두에 둔 기업들의 전략도 VIP마케팅의 한 배경으로 거론된다. 마켓의 다운워드 익스텐션(downward extention)이다. 제일기획 김국장은 “기술 디자인 성능 등에서 상류층을 대상으로 고급이미지를 구축한 제품의 경우 이를 활용한 대중적인 제품이나 브랜드의 창출로 시장확대가 가능하지만, 대중적인 브랜드가 고급브랜드로 올라가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다.VIP마케팅이 붐을 이루면서 마케팅전문가들은 과소비나 사회적 위화감 조장 등의 부정적인 여론을 사전에 차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상류층이 잉여자금을 은행에 넣어두는 것보다는 소비하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되지만 여론을 무시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는게 한 마케팅전문가의 지적이다. 이런 점 때문에 VIP마케팅을 전개하는 업체들도 여론에 촉각을 세우고, 회원관련정보나 마케팅에 대해 밝히기를 꺼리는 곳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케팅전문가들과 업체에서는 상류층의 소비는 경기 등에 영향받지 않을 정도로 꾸준하므로 VIP마케팅은 오히려 더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