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 설립 등 주력 전공분야 색깔 바꿔 새 시장 공략 활발

올해 밀리언셀러가 몇권 나왔다고는 하지만 시장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출판인들은 만나기 어렵다. 속을 좀더 들여다보면 의미있는 출판시장 재편의 움직임이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실용서의 약진과 인문서의 침체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구조조정이다. 출판사별로는 빈익빈 부익부가 극심하고 ‘팔리는 책만 팔리는’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서점과 출판인들의 한결같은 얘기다.교보문고의 분야별 도서 판매 점유율을 보면 올해 상반기 컴퓨터 서적이 점유율 11.3%로 가장 많이 팔렸다. 이어 외국어 서적, 경제 경영서가 순위를 잇는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분류 가능한 세 분야의 점유율 합계는 30.9%에 이른다. 반면 인문과 사회 분야는 작년보다 0.3%, 1.1% 떨어져 6.5%, 5.7%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올해 컴퓨터 서적 가장 많이 팔려상반기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이같은 현상은 뚜렷이 드러난다.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서점조합연합회에서 집계한 판매량 집계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것은 외국어 학습서인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designtimesp=20289>(사회평론). 상반기까지 80만부가 나갔던 이 책은 뒤이어 나온 2권과 테이프까지 합쳐 9월 현재 1백만부를 돌파한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이밖에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designtimesp=20292>(황금가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designtimesp=20293>(문학수첩) 등이 1백만부를 넘기는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교보문고 집계의 상반기 50위권 서적을 분석해보면 실용서의 약진은 훨씬 두드러진다. <부자 아빠… designtimesp=20296>를 필두로 한 경제경영서는 8종이나 50위권에 올랐고, 외국어는 4종, 컴퓨터가 7종이 순위 안에 들었다. 아동서도 처음으로 2권이 50위권 안에 들었다. 이런 상황은 이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아 7, 8, 9월 석달 동안 여전히 같은 책들이 판매 수위를 차지하고 있고,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 designtimesp=20297>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designtimesp=20298> 등이 새로 들어왔을 뿐이다.서점의 매장 배치야말로 요즘 ‘되는 책’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데 교보문고에서는 컴퓨터와 외국어 교재를 판매하는 코너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뚜렷한 독자층 없어 인문서적 판매는 추락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이런 현상을 독자가 전통적인 의미로 책을 읽는 ‘리더(Reader)’에서 뚜렷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찾는 ‘유저(User)’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리딩 퍼블릭’이 사라진 것도 인문서적의 추락에 한몫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인문서를 출간할 때 대학생, 운동권, 학계 등 출판 기획자들이 명확히 타깃으로 삼을 수 있는 계층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무차별 대중을 상대로 책을 만들어야 한다.”황금가지 출판사 권선희 팀장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부자 아빠… designtimesp=20308>를 기획할 때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사농공상’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사회에서 ‘부자’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정면에 드러내는 것도 어쩐지 피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결과를 보니 독자들의 생각이 한 발 앞서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출판사들도 ‘환골탈태’에 부심한다. 두드러진 현상은 ‘되는 책’으로 몰리는 것. 이는 출판 자회사 설립 붐으로 이어졌다. 출판사들이 다른 상호의 출판사를 등록하는 것은 비교적 오래된 일이지만, 최근에는 실용물과 아동물 출판에 진출하기 위해 서둘러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올해 가장 호황을 누린 출판사 중 하나로 꼽히는 민음사는 발빠르게 변화에 대응해 성공한 사례다. 민음사는 다양한 종류의 책을 출간하는 황금가지, 아동물 전문 출판사 비룡소, 과학서적을 만드는 사이언스 북스 등 3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시·소설 등 순수문학과 인문학에 권위있는 출판사로 워낙 인지도가 높은 민음사는 자회사 황금가지를 통해 <부자 아빠… designtimesp=20315>와 같은 책을 낸다. 권선희 팀장은 “민음사는 몇십년 전통을 갖고 있다. 이는 출판사가 쌓아온 무형의 자산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역기능도 한다. 환타지 소설, 실용서, 외국 소설 등 민음사의 이미지가 소화하기 어려운 책을 황금가지에서 내고 있다”고 말했다.올해 말 4개사 합계 1백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민음사는 4개사가 각각 37%(황금가지), 29%(비룡소), 30%(민음)등으로 각사가 비교적 고른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매출 비중이 28%였던 황금가지는 <부자 아빠… designtimesp=20318>의 성공에 힘입어 성큼 올라섰다. 출판산업의 특성상 매출 규모는 곧 수익을 의미한다.김영사도 ‘창사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아 표정 관리에 바쁘다. 김영사는 원래 비소설류에 강점을 보여온 곳으로, 올해도 다양화 전략이 성공했다는 자체 분석이다. 아동물 기획의 성공도 한몫하고 있다. 밀리언셀러 같은 ‘굵직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으나 신간과 스테디 셀러가 고르게 팔려서 역시 올해안에 1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반면 김영사나 민음사와 비슷한 규모의 문학과 지성, 한길사 등은 여전히 인문서에 주력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한길사는 지난해 출간한 80여종의 인문서 가운데 5천부가 넘게 팔린 것은 단 두권뿐이고, 그나마도 인문시장의 축소가 가속화돼 올해 판매량은 작년의 50%선에 머무르고 있다.인문학 분야의 대표적인 출판사로 인식이 굳어진 한길사는 최근 재테크서 등 경제 경영서를 출간하기 위해 기획중인 것으로 알려져 출판계에 작은 충격을 줬다.역시 인문학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창작과 비평도 주력 매출이 아동도서로 옮겨갔다. 인문학 시장이 계속 축소되는데 반해 아동물의 비중은 계속 늘어나 이 회사 매출의 50%를 넘어섰다. 이밖에도 문학동네(북하우스, 괄호안이 자회사명), 문학수첩(북@), 문이당(리드북스), 작가정신(경영정신) 등이 자회사를 설립하고 기존의 ‘전공’과는 색깔이 사뭇 다른 책을 내고 있다.◆‘창작과 비평’도 아동도서 매출 50% 넘어경제 경영서를 전문으로 하는 신생 출판사도 급속도로 늘었다. 굿인포메이션, 새로운 제안, 21세기 북스 등이 두각을 나타내는 곳들. 한편 컴퓨터서적 시장을 석권한 영진닷컴은 민음사나 김영사보다 브랜드 파워에서는 밀리지만, 올 예상 매출 규모가 5백억원(99년 3백20억원)에 이르는 매머드급 출판사다. 컴퓨터 관련서적 시장의 30%(자체추정)선을 점유하고 있다. 영진도 올해 경제 경영관련서를 내기 위해 ‘영진비즈닷컴’이라는 별도의 사업부를 꾸렸다.또 하나, 치열한 시장쟁탈전이 벌어지는 곳은 아동서 시장이다. 굿인포메이션의 정혜옥 실장은 “자신이 읽을 책은 일년에 한권도 살까말까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는 책읽기를 요구하며 정기적으로 책을 사주는 한국 부모들의 특성상 아동서가 각광받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아동물은 재미마주, 보림, 보리, 다섯수레, 우리교육 등의 작은 출판사들이 양질의 아동도서 출판에 고군분투하고 있던 시장에 사계절, 푸른나무, 한길사 등이 가세하는 형국이었다. 아동서의 시장이 확대되자 시공사, 김영사, 푸른숲과 같은 주요 단행본 출판사들도 일제히 아동서 시장으로 새로 진출하거나 또는 확대하고 있다.이렇게 되는 곳에만 몰리는 현상에 대한 시선은 출판계 내에서도 엇갈린다. “상업성있는 책만 만든다”는 지적과 “시대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해야 살아남는다”는 주장이 함께 나오고 있다. 공유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관성으로 책을 만들던 것에서 벗어나 기획력을 키우되 시장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한다”는 막연한 명제뿐이다.★ 인터뷰 / 홍지웅 열린책들 사장“‘제대로 된’ 책 만들면 독자도 알아봐”‘실용서와 아동물 안하면 죽는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출판시장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전공’을 고집하는 출판사들도 있다. 그중 하나인 열린책들. 외국 소설 전문출판이라는 자기 색깔을 갖고, 여전히 이를 지켜나간다. 열린책들에서 낸 책 목록에서는 대형 베스트셀러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장미의 이름 designtimesp=20351>, <개미 designtimesp=20352>, <향수 designtimesp=20353> 등이다. 최근 낸 책중에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례가 없는데, 홍지웅(46)사장은 스테디셀러가 많아 “그럭저럭 돈 번다”고 했다.요즘 ‘대박’을 터뜨린 것이 아닌데도 열린책들은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다른 출판사들이 e-북 준비에 한창이던 지난 6월, 그는 25권짜리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냈기 때문이다. 러시아 작가의 소설은 통상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고, 전집중에는 이미 다른 번역본이 나와 있는 책이 많았다. 더구나 요즘작가의 책도 아닌 순수문학 전집. 한마디로 출판계에서는 ‘정신나간 짓’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홍사장은 번역료 등 3억원이 넘는 ‘과한’제작비를 들여 책을 냈다.“남들 안하는 것 하니깐 언론이 크게 써 줘서, 홍보가 많이 됐다. 2천질 팔아야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데 지금까지 1천3백질 팔았으니 크게 밑지지는 않을 것이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 ‘이 회사에서 나온 책은 믿을 수 있다’는 독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결국 ‘손해 안보고, 이름도 얻고, 칭찬까지 들으니 좋지 않은가’라는 것이 홍사장식 계산법이다.그러나 요즘 열린책들도 실용서를 낼 계획을 갖고 있다. “시대에 맞추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잘 만드는 것”이라고 홍사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번역물 위주, 졸속 기획의 실용서가 범람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책이 나오면 독자들이 알아본다. 그러므로 승산이 충분하다”는게 홍사장의 지론이다.“레비-스트로스의 <슬픈열대 designtimesp=20364>와 와인에 관한 책중 어떤 것이 좋은 책이냐라는 비교는 성립할 수 없다. 충분한 투자와 사전조사, 기획을 통해 성실히 만들면 그것이 가치있는 책이다. 와인에 대한 책이라도 세계 최고로 만들면 <슬픈열대 designtimesp=20365> 보다 양서일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실용서를 만들어 보려고 기획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