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 버스가 도착하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차에서 내려 무거운 책가방을 든 채 걷던 한 중학생이 학원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무궁화기술학원. 이발과 면도를 가르치는 곳이다. 학원안으로 들어선 그는 원장을 만나 이발을 배우고 싶다고 털어놨다. 집안이 어려운 탓에 하루빨리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것.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떤 직업도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원장은 조용히 타일러 돌려보냈다. 부모님 허락을 받아오라면서.





반도체 클린룸용 패널업체인 삼우이엠씨의 정규수 사장(56). 그는 반도체 제조공장의 청정상태를 유지해주는 벽칸막이를 제조하는 기업인이다. 삼우이엠씨는 국내 시장 70%를 차지하고 있고 세계최대 공급업체이기도 하다. 삼성전자의 미국 오스틴 공장과 중국 공장도 이 회사 제품으로 건설됐다. 현대전자의 미국과 중국 공장 역시 마찬가지. 뿐만 아니라 의약품 연구소 등 청정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국내외 기업 수십개소에 납품했다. 삼우이엠씨가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역경에서 비롯됐다. 어려웠던 그의 삶처럼 사업역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 클린룸용 칸막이 국내시장점유율 70%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창업한게 지난 78년. 시작한 사업은 목재로 된 경량칸막이제조. 가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에서 힌트를 얻은 것. 아파트와 고층건물이 들어서면서 수요가 늘고 있었다. 건축자재인 경량칸막이를 만들다가 클린룸용 칸막이 생산에 눈을 돌린 것은 일본을 다녀오면서부터. 반도체공장에선 클린룸이 반드시 필요하고 한국도 언젠가는 반도체사업 붐이 일 것으로 예상하고 이 분야에 진출했다.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2차 석유파동이 나고 경기가 고꾸라지면서 81년 부도를 냈다. 결제대금 1백만원이 모자랐기 때문. 한겨울에 집까지 경매에 부쳐져 길거리에 나앉을 상황에 처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리과장이 사표를 내는 바람에 엔지니어 출신인 정사장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수습에 나서야 했다. 사업을 하다보면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때 신문을 보던 그를 마쓰시타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의 글이 확 잡아끌었다. ‘댐처럼 경영하라’





물을 가득 채워두었다가 꼭 필요한 때에만 내보내는 댐처럼 자금을 충분히 준비해 놓고 꼭 필요할 때에만 아껴서 쓰는 경영이 바로 댐식 경영이다. ‘유비무환’ 경영인 셈이다. 이후 정사장은 어떤 위기가 닥쳐도 끄떡없도록 최대한 절약하며 자금을 비축해 놓는게 습관이 됐다. 이를 반증하듯 삼우이엠씨의 올 상반기 부채비율은 77.4%, 유보율은 5백48%로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갖추고 있다. 연말까지 부채 비율을 46%로 끌어내릴 계획이다.





이 회사가 세계적인 클린룸 패널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적극적인 기술개발로 다양한 첨단제품을 개발한데 따른 것. 특허제품인 무정전 내장패널이 한 예. 정전기를 없애 아주 미세한 먼지조차 벽에 달라붙지 않게 만든 제품이다.





◆ 80년대 초 부도경험 후 ‘유비무환’ 경영 소신





패널에서 발생하는 배출가스를 없애 초청정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노 코킹 시스템’도 만들었다. 바이오 클린룸패널도 선보였다. 삼성전자 기흥공장과 현대전자 이천공장 등에 제품을 공급했다. 반도체 공장뿐 아니라 먼지를 방지해야 하는 곳에 다양하게 납품했다. 예컨대 화학공장 생명공학연구실 의료시설 등. 이를 위해 분야별로 알맞는 제품을 속속 개발했다. SGP클린패널은 산업용 클린룸과 바이오클린룸의 칸막이에 사용되는 제품. 무균 무진 항온 항습의 실내환경을 유지해야 하는 곳에 쓰인다.





클린룸의 벽체와 천장판용인 SGP복합클린패널은 환기구인 닥트와 쉽게 연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품이다. 우레컴 칸막이도 있다. 별도의 접착제 없이 컬러강판 사이에 폴리우레탄폼을 발포해 일체형으로 성형한 내화형 칸막이다. 병원 의약품 제조공장과 냉동 냉장실 연구·실험실에 쓸 수 있다.





이밖에 하이솔 칸막이도 만든다. 가연성 난연 스티로폼에 에폭시본드를 접착제로 삼아 컬러강판을 붙인 제품이다. 내화 차음 단열성능이 우수한게 특징이다.





이 회사는 작년에 6백1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업이익 40억원에 21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올 매출목표는 8백억원. 지난해 4백만달러이던 수출은 올해 7백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매출구성은 클린룸 분야가 절반이고 나머지는 외장재와 내장재가 차지하고 있다. 이중 클린룸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내·외장재는 세라믹 패널, 커튼박스, 팬코일커버, 일반 천장, 특수천장 등이다. 세라믹패널은 고순도 무기질로 구성된 도료 타입의 첨단 코팅제. 기존의 불소수지 아크릴도료 등의 단점을 보완한 제품이다. 특히 내구성 불연성 방음성이 뛰어나다고 회사측은 밝힌다.





정사장은 신제품 개발과 수출에 앞장선 공로로 기업인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육영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이천여자정보고등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80년대초 쓰라린 부도경험이 회사를 알차게 만드는 자양분이 됐습니다. 외환위기와 같은 어려움을 미리 겪은 셈이지요. 이를 거울로 삼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정사장은 댐식 경영과 길목을 지키는 경영으로 삼우이엠씨를 21세기 초우량기업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구상이다. (02)741-1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