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과학 사학자이자 과학 철학자인 토마스 쿤이 유행시킨 낱말로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있다. 쿤의 핵심적인 주장은 자연에 대한 어떤 관찰이나 인식도 패러다임이라는 ‘인식의 틀’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동일한 상황에서도 패러다임을 달리하면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이한 패러다임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패러다임을 달리하는 사람들 간에는 합리적 대화나 의사 소통마저 불가능할 정도로 그 차이는 본질적이다.쿤의 패러다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해방 후 우리 사회에서 야기된 많은 사회적, 정치적 갈등의 대부분이 쿤이 말한 패러다임적 대립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이 들기 때문이다. 그 갈등의 배후에는 역사와 사회, 그리고 정치적 현실을 보는 ‘인식의 틀’에 패러다임적인 차이가 있었고, 그 때문에 ‘힘겨루기’가 아닌, 합리적 방식으로 그 갈등을 해소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해방 직후에 잉태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리고 남북 화해의 물결을 타고 서서히 격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하나의 대립이 그러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그 대립의 뿌리에는 ‘우리’와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매우 근본적인 물음이 깔려 있다. 그 물음은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서 그에 대한 답변이 달라지면 거의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어 있다.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은 ‘국가’이다. 이 경우의 국가란 물론 대한민국을 지칭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한 민족 전체를 성원으로 하여 출발한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민족’ 즉 한민족밖에는 없다는 관점에 입각하는 한, 한국이라는 국가는 ‘우리’와 동일시 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수립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관점이 달라지면 그와 더불어 우리가 아닌 ‘남’ 혹은 더 나아가 ‘우리의 적’이 누구인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체성이 국가에 있다면 대한민국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인하고 나선 북한은 우리의 적이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은 위기에서 피를 흘리고 우리의 생존을 도운 동맹국이 될 것이며 동시에 일본도 두 나라간의 ‘불행한 과거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방이 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를 ‘민족’으로 파악한다면 설사 아무리 피를 흘리고 싸운 과거가 있으며 현재에도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바로 ‘우리’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습적으로 우리를 괴롭혀 온 불량한 이웃에 불과하다. 미국 역시 해방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한 후 한반도의 남쪽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민족 분단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치부될 것이다.두 관점 모두 민족의 통일을 지상 과제로 내걸고 있는 것은 공통이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국가’의 관점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통일이란 궁극적으로 아직 대한민국에 포함되지 않은 한민족을 그 안으로 흡수해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민족’의 관점에서는 당위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지금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국가 가운데 하나를 토대로 통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흡수 통일에는 결사 반대이다. 그 두 국가는 마땅히 통일 과정에서 해체되어 새로운 단일한 국가로 환골탈태하여 나타나야 한다.국가와 민족 가운데 어느 것을 ‘우리’와 동일시해야 하는가는 선택의 문제이지 말이나 논리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점에서 국가와 민족은 쿤이 말한 패러다임적인 대립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립의 성격 자체도 그러하지만 당사자들도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별개의 국가를 수립한 직후 대립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곧장 대화가 아닌 전쟁을 선택함으로써 이후 두 진영 사이에는 이성적인 대화는 고사하고 대화의 길 자체가 봉쇄되었다. 한국에서는 전쟁 후 ‘국가’의 관점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통일을 뒷전으로 돌리고 대한민국을 경제적 번영의 길로 올려놓음으로써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족 통일을 절대적 가치로 고수하려는 ‘민족’ 세력은 각종 탄압을 받고 거의 힘을 상실했다.그러나 ‘민족’ 세력은 통일을 희생시킨 경제적 번영, 그리고 그러한 번영 위에 이루어진 지배 구조를 결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들을 비롯하여 자신들 스스로를 진보 세력이라고 불러온 대다수의 반체제 그룹들은 한국의 현 지배구조가 오직 민족 분단 하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민족’ 진영은 특히 그동안 반체제 그룹들이 줄곧 염원해왔던 지배 구조의 타파가 북한과 화해와 통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단숨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수구 기득권 세력이라고 불러온 지배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데 ‘국가’ 진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지금까지 소수였던 국내 ‘민족’ 진영이 통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북한의 ‘민족’ 세력의 후원을 얻으려 할 것이며 그러한 상황이 현실화할 경우 그를 일구어 온 국가와 그 국가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인 지위가 결정적으로 흔들릴 것으로 불안해하고 있다.통일을 보는 ‘국가’와 ‘민족’의 패러다임간의 차이는 북한에 대한 접근 방법, 그것과 관련된 당면 국가 정책 목표에 있어서도 현격한 견해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의 관점에서는 우선적으로 국가의 힘을 강화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북한에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박정희이후 역대 지도자들이 일관되게 견지해 온 것으로서, 그들은 북한과의 민족적 대결을 감수하더라도 한국을 경제적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일차적 관심사는 국가의 경쟁력 강화가 아닌 통합된 민족 경제의 확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통합된 민족 경제가 확립될 때, 한민족 혹은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단순한 대한민국의 선진국화가 아닌 남북한 경제의 통합을 통한 한민족의 세계 중심화에 있다.김 대통령의 비젼의 타당성이나 실현 가능성은 여하간에 ‘민족’ 패러다임에 어울리는 것이며 또한 북한의 협력이 없이는 달성되기 어렵다. 대통령은 취임 후 야당과의 거리를 좁히려 진지하게 노력한 흔적이 거의 없는데, 그것은 야당을 비롯한 ‘국가’ 진영에 속하는 세력들이 자신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비젼의 실현에 보탬은 커녕 장애물이나 될 것으로 처음부터 의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 지도자들은 대북 정책에 있어서 만큼은 항상 초당적일 것을 강조했다. 김 대통령이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을 버리고 단독적으로 북한에 접근한 배경에도 일부 그러한 의심이 작용했음직하다. 대통령의 노력이 얼마간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한국에서의 반대 세력과의 타협이 아닌 북한의 선의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남남 갈등이 격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이른바 남남 갈등은 해묵은 ‘국가’ 패러다임과 ‘민족’ 패러다임간의 대립으로 여겨진다. 그 대립의 패러다임적 성격과 갈등하는 두 세력간의 현실적 이해 관계, 그리고 북한과의 긴장 완화를 추진하는 대통령의 방식 때문에 남북 화해가 이루어지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 대립 양상은 해방 직후처럼 유혈까지 동반하지는 않더라도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우리 국민은 조만간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 국가와 민족이라는 가치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요구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