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18, 법정관리 11, 매각20, 합병 3사 … “증시상승 두고봐야” 신중론 우세

김진만 한빛은행장(가운데)이 3일 오후 은행회관에서 퇴출기업 명단을 발표하고있다.한달여에 거친 부실판정작업 끝에 29개의 퇴출기업 명단이 발표됐다. 98년6월18일 55개 퇴출기업이 발표된지 약1년4개월만에 다시 한번 몰아닥친 태풍이다. 한켠에서는 ‘2차 퇴출’을 계기로 비상상태에 놓여 있던 국내 금융시장이 회생의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가 되살아나고 있다.실물부문의 환부를 도려냄으로써 금융부문으로의 부실확산을 차단하는 한편 강력한 구조조정 의지를 천명, 국내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게 긍정적인 평가의 골자이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금융과 실물부문에 몰아닥칠 거센 후폭풍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확고한 구조조정 의지의 확인’만으로 주가가 상승하기에는 아직 갈길은 멀다는 신중론이다.외국계 증권사 “큰 고기는 빠졌다”2차 퇴출명단에 포함된 기업들의 면면은 ‘친숙한 얼굴들’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퇴출기업 명단이 발표되자마자 외국계 증권사 가운데 가장 먼저 공식 반응을 발표한 앵도수에즈WI카 증권은 “큰 고기는 그물을 빠져나갔다”는 한마디로 평가를 대신했다. 현대건설과 쌍용양회를 두고 한 말이다. 와히드 버트 WI카 서울지점 이사는 “두 회사뿐 아니라 삼성 금호 고합 쌍용 새한과 같은 재벌기업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며 이들 기업이 앞으로도 한국 금융시장을 ‘지속적으로 물어뜯을 것(continue to dog)’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내놓았다.채권단은 막판까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갔던 갑을 성신양회 등의 기업들은 영업이익이 발생하고 있고, ‘업종특성’을 감안할 때 생존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퇴출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평가대상 2백87개 가운데 이들처럼 퇴출대상에서 제외된 기업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실상 지금까지 형편에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물론 이가운데 1, 2등급으로 분류된 1백63개 회사는 종전처럼 채권단의 운영자금 지원이 이뤄진다. 하지만 3A등급, 즉 ‘주채권은행이 책임지고 보살펴주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들은 채권단의 지원이 지속될지 여부가 주채권은행의 손에 달려 있다.현대건설과 쌍용양회가 퇴출대상에서 일단 제외됐고, 퇴출대상기업들도 이미 ‘부실기업’상태에 놓여 있던 터라 ‘2차 퇴출’이 금융권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게 금융감독원과 채권단의 공식입장이다.3일 퇴출대상으로 발표된 29개 기업의 총 여신규모는 11조4천5백32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법정관리, 워크아웃, 화의 등의 상태에 놓여 있던 20개사의 여신규모가 9조5천2백66억원, 정상상태에 있던 9개사의 여신규모는 1조9천2백66억원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부분 정상으로 분류돼 있던 9개 기업에 대해 ‘요주의’로 대손충당금을 쌓은 상태”라며 “이들 9개사에 담보가 없어 청산기업은 1백%, 법정관리기업은 50%의 충당금을 쌓는다고 가정해도 추가 부담은 최대 1조5천억원 수준”이라고 설명했다.제2 금융권, 부실충격 떠안아야할 판정부의 지원대상에서 한걸음 비껴나 있는 제2 금융권은 1차 퇴출 때와 마찬가지로 부실의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전망이다. 이 경우 ‘2차 퇴출’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은행권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은 물론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 기업들도 금융기관의 자금회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돼 다시 한번 실물부문의 후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29개 기업이 일시에 법정관리 또는 청산절차를 밟게 됨에 따라 해당업체와 관계를 맺어온 기업들의 타격도 막대할 수밖에 없다.퇴출업체로부터 물품대금을 회수할 길이 막히게 되는 것은 물론 이들로부터 받은 어음을 할인해 쓴 경우는 은행으로부터 어음을 되사줘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특히 이미 퇴출의 길로 접어든 동아건설을 비롯, 건설업체들은 국내외 사업장에서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경우 건설업계 특성상 하청업체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다.2차 퇴출로 인해 ‘자금시장의 불확실성 해소-주가상승, 채권시장 회생-기업자금조달 숨통’의 선순환이 시작되면 경제·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같은 선순환구조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증시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게 시장관계자들의 지적이다.그러나 ‘2차 퇴출’을 지켜본 시장의 반응은 ‘유보(HOLD)’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불확실성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데다 현대건설, 쌍용양회와 같은 큰 변수들은 연기된 상태이기 때문에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르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98년6월8일 55개 기업에 대한 퇴출 발표당시 지수가 발표일을 이틀 앞두고 사상최저치인 280대까지 내려갔다가 퇴출발표시점까지 급상승했으며 이후 4개월뒤 본격적인 상승을 보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퇴출에 따른 불안감 해소가 본격적인 주가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다.그러나 당장은 시장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지수 600선 언저리에서 악재들이 일시에 얽히면서 터져 나온 급락을 메우는 정도의 반등정도는 기대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구조조정보다는 해외변수가 오히려 시장의 주 요인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박만순 미래에셋증권 이사는 “미국시장의 금리인하 행진이 멈췄고 유로화 유가 등의 변수가 안정세를 보이는 점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고 지적한다.★ ‘태풍의 눈’ 현대건설 어떻게 되나시한부 회생 … 위기극복 ‘첩첩산중’정부와 채권단이 3일 현대건설에 대한 명확한 처리방안을 내놓지 않음에 따라 현대건설은 여전히 소멸하지 않은 태풍으로 시장의 중심에 놓이게 됐다.채권단과 금융감독원은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동원했다고 밝혔지만, 현대는 오히려 “한고비 넘겼다”는 반응을 보였다.해석이야 어떻든 현대건설은 당장은 부도가 나지 않더라도 연말까지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전망이다. 현대건설측은 “최근의 유동성 위기는 금융기관들이 만기연장 합의를 지키지 않고 차입금을 회수한 요인이 가장 크다”며 “채권은행단의 결의처럼 기존 차입금만 만기연장되면 충실한 자구계획을 통해 자금을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건설은 우선 선지급 투자자금과 받을 어음 할인을 통해 일시적인 유동성을 해결하면서 서산농장 매각,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의 계열사 지분 매각을 통한 증자 등을 통해 자금이 유입되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그러나 금융감독원은 “은행권의 기존 여신 만기연장은 연말까지 한시적인 조치여서 현대건설측이 불과 두달도 안남은 기간내에 금융권 부채를 크게 줄여야 한다”며 “더욱이 이 기간중에도 물품대금을 결제해야 하고 개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회사채 기업어음(CP), 해외채권도 만기가 돌아오면 스스로 갚아야 한다”며 자력갱생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현대측이 밝히고 있는대로 자산매각, 대주주 추가출자 등을 통해 1조5천억원 이상의 자구계획을 이행, 금융권 부채를 크게 줄인다면 현대건설은 회생할 수 있다. 그러나 연내 자구계획을 이행하는 도중에 물품대금을 결제하지 못하거나 만기가 돌아오는 개인 보유 채권, 해외채권 등을 막지 못하면 부도후 법정관리로 회부된다. 현대건설 대주주들이 경영권을 잃더라도 회사는 살리겠다면 법정관리전에 ‘감자후 출자전환’이 이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