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Suntory)는 일본의 수많은 술 회사중 하나다. 한국의 애주가들에게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산토리 올드’ ‘야마자키’등의 위스키를 만드는 회사다. 맥주, 생수, 청량음료, 차 등 다양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있지만 위스키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소비자들은 산토리라는 회사 이름만 들으면 바로 위스키 제품을 연상해낸다. 자연 일본 시장에서 종합 식음료 메이커로 차지하는 위상은 경쟁타사들에 비해 약한 편이라는게 외부의 대체적인 평가였다.하지만 일본기업들의 중간결산(일본은 회계연도가 4월부터 다음해 3월말까지)실적이 드러나고 기업들이 중기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한 지난달부터 주류시장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겨났다. 내로라 하는 주류회사들에서 조그마한 중소 메이커에 이르기까지 산토리 경영을 따라 하려는 ‘산토리화’ 움직임이 부쩍 가시화된 것이다.산토리 따라하기의 대표 주자는 아사히, 기린맥주 등 산토리를 몇수 아래로 내려다 보던 경쟁기업들이다. 이들은 양주, 음료, 식품에서 약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취급하는 종합 메이커로 탈바꿈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를 두고 주류업계에서는 산토리가 위스키 한 품목에 의지했던 ‘외다리타법’ 경영을 버리고 다각화로 열차를 바꿔 탄 80년대 전반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다고 말하고 있다.산토리가 위스키 한 품목에 의지했던 '외다리 타법' 경영을 버리고 다각화로 바꾼 뒤 나온 제품들.맥주수요가 부진을 면치 못하자 아사히, 기린이 종합메이커로 일찍부터 변신을 서두른 산토리의 성공을 염두에 두고 뒤늦게 시동을 걸었다는 것이다.주류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최정상급에 못미쳤지만 산토리가 거둘 올해의 성적은 다른 기업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산토리는 올 한해 동안 작년보다 7% 늘어난 1조3천8백26억엔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경상이익은 26% 증가한 5백96억엔으로 사상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주류에서는 분명 열세이지만 전체 매출로 본다면 기린의 1조6천억엔, 아사히의 1조4천억엔에 견주어 손색없는 수준이다.주류업계 전문가들은 이같은 성적을 두고 산토리가 십수년간 씨를 뿌려온 독자적 스타일의 경영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며 비결을 주목하고 있다.산토리 파워 원천은 ‘톱 브랜드 전략’이와함께 산토리 파워의 원천을 ‘톱이 아니면 2등이라도 노리는 강한 브랜드 전략’과 ‘철저한 현장주의’그리고 ‘수평적이면서도 탄력적인 사내조직’, ‘원활한 상하 커뮤니케이션’등에서 찾고 있다.산토리의 톱 브랜드 전략이 가장 눈부신 성과를 거둔 곳은 무엇보다 식품사업 부문이다. 산토리는 90년대 초반부터 내놓는 제품마다 강력한 브랜드를 심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 결과 한가지 제품에서 거둔 성공이 씨앗이 돼 또 다른 수익을 창출하는 호순환이 반복돼 왔다.대표적인 예가 92년톱 ‘보스(Boss)’브랜드를 앞세워 캔커피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이다. 산토리는 철저한 사전 조사와 치밀한 마케팅 전략을 발판으로 모든 영업력을 쏟아부으며 선발회사들을 따돌렸다. 그 당시의 경험이 바탕이 돼 산토리는 ‘다산다사’(多産多死)가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던 음료시장에서 상품전략을 ‘강력한 소수정예주의’로 전환했다. 또 아무리 노력해도 강한 브랜드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는 과감히 미련을 버리고 다른 말로 바꿔 타는 전략을 택했다.산토리는 97년 미국 펩시코사로부터 펩시콜라의 판매권을 따낸데 이어 내년부터는 연간 판매량이 9백만 상자도 안되는 고유브랜드 ‘피코’를 없애기로 했다. 대신 일본 레버사와 손잡고 세계최대의 홍차 브랜드인 ‘립튼’ 제품을 일본 시장에서 판매할 예정이다.이 회사 고바야시 음료사업부장은 “1년 판매량이 2천만 상자는 넘어야 편의점 진열대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며 “이를 위해서는 고유브랜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톱브랜드 전략이 먹혀 들어가면서 산토리는 위스키에 치우쳤던 영업의 중심을 음료로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 연간 5천여만 상자가 팔리는 보스 산토리 우롱차뿐 아니라 펩시콜라 생수, 레몬탄산수 등이 모두 2천만~3천만 상자씩의 판매량으로 시장에서 1, 2위를 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산토리는 일본 음료시장에서 코카콜라 그룹에 이어 외형 2위를 차지할 정도의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으며 전체 매출의 3분의 1을 식품부문에서 올리고 있다.적자나는 브랜드와 사업은 군말없이 잘라낸다는 전략은 해외사업 부문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산토리는 30여년 전에 일제 위스키의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위해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지만 본고장 위스키에 밀리자 사업방향을 현지 회사 인수 및 업종 다각화쪽으로 틀었다. 미국에서는 생수, 중국에서는 맥주, 아시아 지역에서는 건강식품등의 사업을 전개중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산토리는 현재 33개 해외 현지법인중 31개사에서 흑자를 올릴 만큼 물샐 틈없는 ‘알짜 글로벌화’의 성과를 뽐내고 있다.현지밀착 경영 ‘알짜 글로벌화’ 성공업계 전문가들은 산토리 변신의 또 다른 에너지원을 수평적 회사 조직과 원활한 사내 커뮤니케이션에서 찾고 있다.이 회사는 어느 사업부문도 사장으로부터 부장에게, 부장으로부터 또 다시 사원에게로 권한이 폭넓게 위임된 강점을 갖고 있다. 신제품 개발을 예로 들면 고위층은 어느 제품이 언제 나오는지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뚜껑이 열린 후에라야 알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제품에 대한 불만이나 재검토의사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실무 담당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기 때문에 이같은 경우는 별로 없다는게 회사측의 자랑이다.제품개발에 실제 투입되는 인력 또한 디자이너, 연구소 직원 그리고 선전부의 카피 라이터 등을 중심으로 한 실무자들이다. 이들이 격론을 벌여가며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담당부장이 보고 받는 기회도 극히 한정돼 있다.“제품개발은 시장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잘 안다. 제품에 대한 평가는 윗사람에게 묻지 말고 시장과 소비자에게 물어라.”도이 신이치로 산토리 사장은 시장에 철저히 밀착된 현장주의야말로 강한 제품, 튼튼한 회사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도이 사장의 리더십은 판매 일선에서도 산토리 영업맨들의 스피디한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힘이 되고 있다.산토리는 올 한해 동안 음료와 맥주시장에서 다른 경쟁업체들이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에도 연이어 빅 히트를 날렸다. 영업맨들은 대형 유통업체 매장을 수시로 드나들며 경쟁사 제품의 판매가격을 비교 조사한 후 회사와는 간단한 업무연락만을 취한 채 그 자리에서 값을 조정해 주는 기민함을 발휘했다.경쟁업체들과의 경품전쟁에서도 산토리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은품으로 주스음료 판매량을 작년 여름보다 30% 가까이 늘렸다. 마케팅은 마케팅대로 커피 광고에서 도이 사장을 비웃는 내용의 코믹CF까지 동원하며 소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과감한 권한 위임과 상하간의 굳은 신뢰 그리고 벽을 허문 진실한 대화가 없이는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주류시장 관계자들은 강한 브랜드와 수평적 조직을 축으로 한 산토리의 ‘승리 법칙’이 언제까지 호성적을 거둘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조직, 풍토, 사고방식에서 3F(Flat, Frank, Flexible)를 강조하는 산토리의 장사방식이 알찬 열매를 맺은 것은 분명하다며 ‘산토리류 경영’이 주류업계의 최대 키워드가 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