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마를 두르고 매장에서 직접 일하는 와타나베 사장.“어린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른 데로 갔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아르바이트 종업원이 갑자기 그만 두고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일손이 달려 그랬습니다만….”“당신들 농담하지 말아요. 그 어린 아이가 우리 식당에 가는 것을 아침부터 손꼽아 기다렸다고 생각해 봐요. 정말 그럴 수 있는 겁니까?”2000년10월24일 이른 아침. 와타미(和民)푸드 서비스의 와타나베 미키(渡邊美樹,42) 사장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 차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꼭두새벽부터 출근해 회의 테이블 앞에 앉은 간부사원들은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지 못했다.가족단위 대상 친절서비스 적중와타나베 사장이 주재하는 주1회의 업무개혁회의가 열린 이날, 참석자들은 고객이 제기한 클레임과 관련, 사장의 고함과 잔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어야 했다.장기불황의 상처가 깊어지면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다른 어느 업종보다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일본 외식업계에서 21세기의 기수로 꼽히는 와타미 푸드 서비스.이 회사가 경쟁사들뿐 아니라 고객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차세대 ‘외식벤처’의 선두주자로 부각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우선 업태다. 와타미 푸드 서비스가 내걸고 있는 장사스타일은 이쇼쿠야(居食屋)다. 서구식 퍼브나 한국식 간이 주점을 연상케 하는 이자카야(居酒屋)는 일본의 주당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 서민음식점이다. 자연히 장사의 초점은 음식보다 술에 있다. 이용하는 고객들도 음식보다는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다. 어린이, 노약자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고객보다 성인 남녀끼리의 그룹이 주를 이룬다.그러나 와타미는 다르다. 와타나베 사장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이쇼쿠야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요소를 갖춘 이자카야’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가정의 식탁’을 키워드로 제시하고 있다. 이자카야 특유의 푸근하면서도 서민적인 분위기에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메뉴를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가족 단위의 고객이 많이 찾아 오다 보니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종업원들의 서비스도 발군이다. 청결, 친절은 기본이고 고객이 돌아갈 때는 문 밖까지 배웅을 나온다. 일반 이자카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다.“어찌됐건 고객의 충실한 머슴이라는 생각으로 일하라”는 와타나베 사장의 주문이 종업원들의 몸짓과 의식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결과다.독특한 업태와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고객제일주의가 먹혀 들어가면서 와타미 푸드 서비스는 고성장가도를 숨가쁘게 질주, 지난해 3월 도쿄증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92년 창립후 8년만의 일이었다. 점포 수는 지난해 말 1백60개점을 넘어선데 이어 오는 4월 활동무대가 도쿄 중심의 간토 일대에서 오사카 일원의 간사이로까지 넓혀질 예정이다.상반기까지는 중국 상해와 괌에도 점포를 내 해외시장 개척에 본격 나설 계획이다. 괌은 제휴 파트너인 T.G.I. 프라이데이로부터 이미 점포를 넘겨 받았다. 21세기에는 일, 미, 중국의 3극체제를 발판으로 글로벌화를 강력히 추진해 나가겠다는 장기 구상의 일환이다.요코하마 출생의 와타나베 사장은 어릴 때부터 사장이 되겠다는 꿈과 오기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에게 지고는 가만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아버지가 광고CM 제작회사의 사장이어서 유복한 집안 환경에서 늘 사업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시절 모친의 별세 직후 부친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와타나베 사장의 인생엔 가시밭길이 시작됐다. 중·고교와 대학(메이지)시절은 맨주먹으로 앞길 개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사업체를 꾸려 나가는 사장의 꿈은 접지 않았다.와타나베 사장은 창업자금을 손에 쥐기 위해 20대 중반 택배회사의 세일즈 드라이버 일에 뛰어들었다. 한달에 36만엔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하루 수면시간은 고작해야 4시간.까딱 잘못하면 고객의 불평과 상사의 욕설을 듣기가 일쑤였다. 짐짝에 얻어 맞기도 했고 허리를 걷어 채여 일주일간 병상에 누워 지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목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1년을 버티며 3백만엔을 손에 쥐었다.“더 쉽게 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꿈을 실현시킬 밑천은 땀흘리며 번 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주위 사람들은 와타나베 사장이 세일즈 드라이버의 일을 오래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오기와 집념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자기 사업을 시작하기 직전인 84년 3월 하순, 그는 우연히 일본 외식업계에서 당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쓰보하치’라는 업체의 가맹점 계약을 따내게 됐다.자기와 같이 사업을 하기로 했던 친구를 통해서였다. 대학졸업 후 쓰보하치에 근무 중이던 와타나베 사장의 친구가 동업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쓰보하치의 이시이 세이지 사장이 오히려 와타나베 사장에게 가맹점을 하나 내준 것이었다.이때가 와타나베 사장에게는 인생의 최대 전기였다. 와타나베 사장은 가맹점을 운영하면서 점포관리 노하우와 외식업계의 생리를 밑바닥서부터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그리고 이를 밑거름 삼아 와타미를 세웠다. 와타나베 사장이 이시이 사장을 생애 최고의 은인으로 여기고 이시이 사장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와타미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퇴임한 뒤 지구촌 문맹퇴치 앞장설 계획와타나베 사장은 철저한 일벌레다. 한달에 보름은 새벽 4시에 일어난다. 간단히 요기를 한 후 6시 전에 회사에 도착해 임원회의와 업무개혁회의 등 각종 모임을 숨가쁘게 주재한다. 그리고 점포와 현장을 돌며 업무를 챙긴다. 한달이면 3천여통이나 들어오는 고객앙케트를 일일이 다 읽어보는 것도 그요, 고객에게 내놓을 식자재를 가장 꼼꼼히 살펴 보는 것도 그다.매일 밤 12시가 넘어야 집에 돌아오지만 매일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잠자리에 든다.사업 시작 전부터 외식업에서 승부를 걸겠다고 다짐했을 만큼 그가 품은 포부는 원대하다. 그는 창업당시부터 40세가 되는 1999년 회사를 상장시키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 자금난 등 우여곡절을 겪은 탓에 계획은 다소 차질을 빚었지만 그는 결국 2000년에 첫 꿈을 실현시켰다. 그리고 이제 오는 2010년이면 1천 점포, 2020년이면 50개 계열사에 총매출 1조엔을 달성한다는 각오를 굳히고 있다.목표 실현을 위해 그는 신규사업에도 급피치를 올려 서구식 스타일의 패밀리 레스토랑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개점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하지만 그가 꾸는 최고가치의 꿈은 다른데 있다. 외식업계 정상에 오르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학교를 세우겠다는 것이다.“50세까지는 일본에 학교를 건립하고 60세까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세계 각국에 학교를 보급하는데 남은 인생을 바칠 것입니다.”지구상의 문맹퇴치에 60세 이후의 인생을 쏟아붓겠다는 와타나베 사장은 이를 위해 ‘스쿨 에이드 재팬’이라는 비정부조직(NPO)을 설립해 놓고 있다. 그리고 곧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우는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자신이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번 돈은 모두 이곳에 기부했다. “와타나베 사장이 다른 벤처 사장들과 다른 점은 쓴 맛, 단 맛을 다 경험했다는 것일 겁니다. 그는 야구선수로 말하면 직구 말고도 변화구를 섞어 던질 줄 아는 지혜와 경륜을 갖췄습니다.”일본 외식업체 관계자들이 평하는 와타나베 사장의 인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