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로 개발한 첨단 맞춤축구화, 동남아 그라운드서 인기몰이...중남미시장 개척 시동

지난 1월3일 일본 요코하마 국제경기장, 한국 및 일본 대표선수들과 세계 올스타의 대결. 최용수 고종수 나카야마 마테우스 오르테가 칠라베르트 등이 출전했다. 개인기와 유명세만을 비교하면 세계 올스타가 한수 위. 하지만 축구공은 둥근 법. 조직력이 중요하기 때문.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한·일 올스타는 바람을 가르는 고종수의 프리킥에 힘입어 1대1로 비기는 저력을 보였다.김 휘(56) 키카 사장은 이날도 어김없이 축구경기를 관람했다. 시선은 선수들의 신발에 쏠려 있었다. 그 자신이 축구화를 만드는 기업체 사장이기 때문. 최전방 공격수로 나온 최용수는 ‘K’자 로고가 선명히 새겨진 키카 축구화를 신고 뛰고 있었다. 키카를 즐겨 신는 선수는 최용수뿐이 아니다. 국내 축구선수중 베스트11에 꼽히는 마시엘과 안드레 역시 키카를 즐겨 신는다.지난 94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월드컵 때는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이 키카 신발을 신고 나오기도 했다.태국에서 키카 축구화는 세계 유명브랜드 제품과 같거나 좀더 비싸게 팔린다. 퀸스컵대회에서 한양대팀이 8연패를 하면서 한국축구에 대한 인기가 높고 덩달아 한국 축구화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세계의 축구용품 시장은 나이키 아디다스 등 거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엄청난 광고비를 들여 스포츠스타와 계약, 스포츠마케팅을 전개해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국내시장 역시 마찬가지. 이런 환경속에서 키카는 토종브랜드로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기업이다.축구화를 주력으로 축구공 축구복 등 축구용품을 생산하는 이 회사가 내세우는 구호는 ‘All of Soccer(축구에 관한 모든 것)’이다. 지난해 매출은 약 1백억원. 이중 수출이 1백만달러를 차지한다. 키카 제품은 중동 동남아 등 10여개국으로 수출된다. 앞으로 5년내 1천만달러 수출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매출의 절반을 해외시장에서 일군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올해부터 동남아 공략을 강화하고 중남미시장 개척에도 나설 계획이다.키카가 걸어온 길은 평탄하지는 않았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경북대 수의학과를 나온 김사장은 공무원을 거쳐 서울 장충동에서 수의사생활을 했다. 그가 축구용품으로 인생역정을 바꾼 것은 친형이 외국 축구용품을 수입하던 것에서 비롯된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만 해도 국산 축구화는 켤레당 3천5백원에서 7천5백원선. 반면 최고급 외산은 7만원에 달했다. 그런데도 축구선수들은 외산을 사 신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품질이 좋다는 것.그는 오기가 발동했다. 직접 질좋은 축구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부산에 있는 운동화 기술자들을 스카우트해 성남에 공장을 차렸다. 당시 이름은 삼광스포츠(그후 사명을 아주물산으로 바꿨다가 96년 키카로 변경). 직원 8명에 20평짜리 공장에서 축구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있었다. 세계적인 기술력을 지닌 부산의 운동화 전문가들을 데려온데다 외국제품을 벤치마킹하면 얼마든지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몇달 동안 준비끝에 시제품을 내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키카를 신고 뛴 사람들의 항의가 줄을 이었다. 한번 신었는데 밑창이 덜렁덜렁하고 바닥에 박은 뾰족한 스터드가 뭉개진 것. 그제서야 축구화가 일반 운동화와는 다른 차원의 제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길로 스스로 기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분야별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발의 모양을 본딴 금형을 만드는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기술을 익혔다. 무엇보다 한국의 운동장 사정이 외국 잔디구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맨땅이 많아 스터드나 밑창 등의 소재가 달라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키카는 세밀한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생산제품을 세분화, 치수도 타사 제품이 보통 5mm단위인 것과 달리 2.5mm단위로 생산한다.월드컵관련 상품생산 유망기업에 선정한국인의 발은 외국인과 다르다는 점도 알아냈다. KIST에 있는 전문가 자문을 얻어 한국인의 족형에 맞는 모양을 파악했다. 서양인은 발등이 낮고 볼이 좁은 반면 한국인은 발등이 높고 볼이 넓었다. 이같이 세밀한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다시 시작했다. 생산제품을 세분화하고 치수도 타사 제품이 보통 5mm단위인 것과 달리 2.5mm단위로 생산했다. 볼도 4가지 타입으로 내놨다. 좁고 보통이고 넓고 아주 넓은 것 등. 물론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것은 그만큼 비용이 더 들고 관리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여러가지 모델을 선보였다. 특히 축구화의 생명인 편한 착용감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첨단 축구화 생산시설인 영국 USM사의 자동생산링크 시스템도 도입했다. 이들 시설을 경기도 광주공장에 설치했다. 제품을 만들면서 두가지를 고수했다. 철저히 자기브랜드로만 만든다는 것. 몇몇 외국 유명업체들이 품질이 뛰어난 것을 알고 주문자상표로 만들어줄 것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거절했다. 자기브랜드가 없으면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직접 생산했다. 고객에게 최고 품질의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자가공장에서 꼼꼼한 품질검사를 거쳐 내놓고 있다. 덕분에 Q마크를 얻었다. 96년에는 신소재인 축구화 탄소섬유창을 개발했고 97년에는 월드컵관련 유망기업으로 지정받기도 했다.생산능력은 하루 평균 국내 4천켤레, 중국 톈진 1천켤레. 태국업체인 그랜드스포츠그룹과 작년말 전략적 제휴를 맺고 태국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품질로 외국기업과 당당히 겨뤄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겠다”는 김사장은 초등학교 축구연맹회장, 전국풋살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등 생활체육 발전에 관심을 쏟고 있기도 하다. (02)2235-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