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일즈 대통령’ ‘세일즈 총장’이란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세일즈 대통령’은 국내기업의 해외매각을 추진하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해외를 방문하거나 외국기업인을 면담할 때마다 “좋은 기업이니 비싸게 사라”고 말을 하는 등 외국기업의 한국투자를 적극 유치하고자 노력한데서 나온 말이다. 서울시내 한 사립대학 총장이 취임했을 때는 대학행정에 기업 경영기법을 도입하겠다는 뜻으로 ‘총장의 세일즈맨화’를 외쳤다.이렇듯 ‘세일즈’자체는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으나 직업으로서의 세일즈맨, 즉 영업직은 사실상 기피직종중의 하나였다. ‘사농공상’이라는 구식 잣대로 상인, 즉 ‘장사꾼’을 낮게 보는 직업적 편견도 큰 몫을 했다.가장 큰 이유는 영업직을 우대하지 않는 기업의 인사시스템이다. 명문대 출신의 우수인력은 기획실이나 일반 관리직 등으로 배치해 ‘머리’로 대접하고, 영업직은 ‘발’이나 ‘꼬리’로 내몰렸다. 물론 영업직의 특성상 ‘머리만 큰 사람’이 버티기 힘든 점도 있었지만, 영업직을 기업의 핵심으로 여기지 않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이 때문에 영업직은 인기가 적은 지방대나 전공이 불분명한 문과출신이 ‘할 수 없이 선택하는’ 직종처럼 여겨졌다. 주변에서도 누군가 “나, 영업사원이야”라고 하면, “애걔, 겨우 영업사원? 오죽했으면…”식으로 측은하게 봐온 것이 현실이다. 이같은 현실은 요즘이라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영업직 전문화·고학력화 속속 진행서울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99년12월 한국얀센 영업직에 입사, 영업경력 2년째를 맞고 있는 송혜경씨는 “졸업을 앞두고 제약회사 영업직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물론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보는 주변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영업직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그러나 다행히도 일부 업종에선 영업직의 전문화 및 고학력화가 속속 진행되고 있다. 주로 제약이나 IT, 보험업이 주종이긴 하지만, 업체마다 많게든 적게든 영업조직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면서 영업직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점점 거세지고 있는 경쟁환경이 영업조직의 강화를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제약업계에선 특히 의약분업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전문 영업조직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업체마다 영업사원을 늘려 뽑는 것은 물론이고 인센티브 강화 등 각종 당근 전략으로 우수인력 확보에 혈안이 돼 있다. 당연히 명문대 출신의 고급인력들이 몰려들어 수백대 일의 입사경쟁률을 보이기도 한다.인터넷 벤처업계는 더 다급해졌다. 지금까지 기술개발과 마케팅에 주력해오던 전략에서 영업중심으로 경영전략을 바꾸고 있다. 수익성이 최대의 관심사가 된 만큼, 아무리 우수한 기술이라도 팔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세일즈맨 출신 사장, 부사장을 영입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으며, 기술영업 전문가를 찾는 구인공고가 채용전문 사이트를 도배하기도 한다.이렇게 된 가장 두드러진 계기는 IMF라는 경제위기였다. IMF 이후 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반 관리직 사원들은 대폭 추려내면서도 영업직 직원만은 살려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일부는 영업직 사원들을 오히려 늘리기도 했다. “팔아야 산다”는 것이 업계의 화두가 됐기 때문이다.영업직을 보는 구직자의 눈높이도 달라졌다. 가뜩이나 평생직장 개념이 엷어진 요즘, 일반직의 설자리는 더 좁아지고 있는 대신 영업직의 사기는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기업에서 영업직을 우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영업직을 거친 사람이라면 최악의 경우에서조차 살아나갈 능력이 있다는 점도 영업직에 대한 플러스 요인이다.영업직 사원들이 하나같이 꼽는 영업직의 매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영업을 통해 살아가면서 생길 수 있는 온갖 어려움, 온갖 경우들을 수없이 거치며 그만큼 내성이 강해졌다고나 할까.33년 동안 대상 영업부에서 근무하며 ‘영업의 달인’으로 불리다 퇴직한 권종숙씨는 “일반 관리직이 온실속의 화초라면 영업사원은 들판에 핀 들꽃이나 잡초”라는 말로 차이를 설명한다. 그는 일반 관리직 출신은 IMF이후 길을 찾지 못해 실의에 빠지거나 사업을 시도하다 실패,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영업직 출신은 재취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몸값을 높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요즘 영업직을 선호하는 신세대 구직자들도 영업직의 이같은 매력에 상당히 경도되고 있다. 이왕이면 기업에 직접적으로 수익을 내주는 부서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에서 비롯해 자유로운 업무 스타일과 ‘뛰는 만큼 벌 수 있다’는 능력주의도 이들에겐 매력이다.사실상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 성과급 또는 인센티브가 주어지는 영업직의 특징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기본원리다. 현재 많은 기업에서 추진되고 있는 연봉제도 이같은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기업은 연공서열에 따른 호봉제로 이런 원리를 등한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업직에서 이런 원리를 만끽할 수 있다면 영업직을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요즘 신세대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단순한 취업보다 ‘자기사업’을 선호하며, 그 전단계로 영업직 경험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한국얀센의 송혜경씨는 “최종적으로 ‘내 사업’을 해보고 싶다. 영업을 하면서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든 과정이 비즈니스 스킬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영업직에 대한 당찬 열성을 보였다.한때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기도 했던 영업. 미국 등 선진국에선 유명기업의 CEO중 세일즈맨 출신이 적지 않지만, 국내에선 이런 저런 편견으로 홀대를 받아온 것이 영업직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영업직이 기업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세일즈맨이 진정한 전문직으로 존중받게 될 날을 기대해 보자. “최고의 제품이라고 항상 잘 팔리는 것은 아니다(The best product does not always sell)”라는 경영학 교과서의 경구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