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50대 대기업의 평균 매출은 연 5백8억달러다. 우리돈으로 치면 60조원을 약간 넘는 선. 15년전인 80년대 중반보다 무려 70% 늘어났다. 당시 18개뿐이던 종업원 10만명 이상의 회사도 이제는 50개가 넘는다. 지난 10년간의 합병열풍과 신경제의 물결이 ‘거인’들을 대거 탄생시킨 것이다.이 거인들이 요즘 시련기를 맞고 있다. 이들은 지난 10년간 미국 경제성장의 강력한 엔진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량해고의 칼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최대기업인 GE를 비롯, 다임러크라이슬러 월드컴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이 인수합병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델 컴퓨터의 CEO 마이클 델그렇다면 이 거대기업들의 역사적인 사명은 끝났는가. 이들 기업을 이끄는 CEO들의 대답은 한마디로 ‘노’다. 기업의 거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이런 기업을 이끄는 CEO들의 역할이 그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춰 경영할 수 있다면 기업의 규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게 이들의 공통적인 얘기다.대표적인 사람이 이른바 신경제의 대표주자격인 시스코시스템스의 존 챔버스 사장 겸 CEO. 그는 “첨단 기술 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거대기업들은 바로 그 요인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규모가 커지고 있다”며 “CEO가 첨단시스템을 잘 관리할 수만 있다면 기업의 규모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첨단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는 CEO들이 거대기업을 몸집만 크고 머리가 없는 ‘공룡’으로 만들고 있다는 설명이다.보잉사의 CEO 필립 콘디트 회장챔버스 ‘규모가 새시장 개척에 유리’창업한지 15년밖에 안됐지만 4만명의 종업원에 2백억달러의 연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시스코를 경영하는 그는 정보화시스템을 통해 매일 그날의 매출 종업원수 이익 생산성 등을 파악하고 e메일과 보이스메일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기업의 규모보다는 올바른 시장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며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 때는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게 오히려 유리하다고 말한다.상황은 구경제회사도 마찬가지다. 전력 의료장비 항공엔진 NBC텔레비전네트워크 GE캐피탈파이낸셜서비스 등을 가지고 있는 GE의 경우도 거대함의 장점을 잘 살려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GE의 성공도 결국은 CEO인 잭 웰치회장의 지휘력탓이다.GE의 CEO 잭 웰치 회장시장지배를 위해 기업규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지난 10년간 급성장, 1천3백억달러의 매출과 4천7백억달러의 시가총액을 가진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됐다. 잭 웰치의 후계자로 결정된 제프리 임멜트 차기회장도 “GE에 맞는 사이즈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공언할 정도다.학계에서 기업 대형화로 인한 비효율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P&G의 경우도 새로 임명된 CEO인 A.G. 래플리가 대형화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그 강점을 살리는 쪽으로 전략을 집중하고 있다. 일본 고베대지진이 일어났던 95년 아시아책임자를 지냈던 그는 “당시 핵심공장이 무너졌으나 불과 몇시간만에 제품공급등 경영활동을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며 “이는 다른 나라에 있는 공장에서 상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제화된 대기업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다.시스코시스템스의 CEO 존 챔버스 사장기업의 거대화는 CEO의 역할도 변화시킨다. 일상 업무는 ‘대리인’에게 넘기고 장기경영전략회의나 투자자나 언론과의 접촉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게 CEO의 주요 업무가 됐다. 대부분의 CEO들이 일개 기업의 총수라기보다는 한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지난 여름 GM의 CEO가 된 와그노어의 사무실 인터넷은 하루종일 연결되어 있다. 매일 6개의 신문과 세계 각국의 잡지를 훑어본다. 그는 “CEO는 이제 세계 어디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알아야 한다”며 “회사내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세계 어디에 문제가 있고 어디에 기회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업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전세계 임직원들과 e메일시스템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보잉사의 필립 콘디트회장은 내부 직원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부족을 발달된 통신망을 통해 해결한다. “회사가 커지면서 직원들과 자유롭게 얘기할 시간은 줄어드는 대신 공식 연설할 시간만 많아지고 있다”는 그는 그래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단순화해서 반복 전달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직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는 ‘핵심사업에 주력하라, 장점을 살려라, 새로운 프론티어를 개척하라’는 메시지를 공식연설은 물론 16만명의 직원들에게 e메일을 통해 보내기도 한다.CEO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CEO를 보좌하는 기능도 커지고 있다. 거대기업 CEO의 주요 임무가 장기계획수립과 고객들과의 만남을 중시하는 것으로 변함에 따라 일상의 경영활동을 챙기는 ‘대리인’이 필요해지고 있다.CEO 역할 커지면서 보좌역도 강화델 컴퓨터의 CEO인 마이클 델은 “연매출 3백억달러의 회사를 혼자 경영한다면 그는 아마 곧장 죽어버릴것”이라고 말한다. 델은 그래서 97년(케빈 롤린스)과 99년(제임스 밴더슬라이스) 각각 1명씩 모두 2명의 부회장을 임명했다. 그가 고객들과 만나고 전략을 세우는 동안 이들이 매일 매일의 일과를 처리한다.제인 샌더스 킴벌리클락 회장도 99년말 토마스 폴크를 2인자에 임명했다. 세계 40개국에 공장이 있는데다 95년 스콧페이퍼 인수뒤 매출이 두배로 늘어난 회사를 혼자서 챙기기가 버거워진 것. “거의 모든 매출이 해외에서 일어나는 우리 회사에서는 해외가 성장의 핵심이다”며 “때문에 그동안 해외출장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 일을 제대로 못했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는 “폴크가 일상업무는 물론 많은 해외출장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젠 PR와 IR에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얘기한다.결국 앞으로 기업활동의 성패는 규모가 아니라 첨단정보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는 유능한 CEO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게 미국 기업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