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은행 김정태행장이 취임한 지 얼마 안돼 공개석상에서 지점장을 망신 준 적이 있다. 회의석상에서 “우리 점포에 수십억원 유치했다”고 자랑하는 지점장에게 “그래서?”라고 반문, 분위기가 썰렁해진 것이다. 자금운용할 곳이 없어 역마진이 우려되더라도 거액예금유치는 미덕인 은행문화에서 김행장의 행동은 튀는 것이었다.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수신고 대신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과 총자산이익률(ROA)이 모든 은행의 최대 관심사이다. 돈이 안되는 예금은 “고맙지만 사양”이다. 그러다 보니 타깃시장도 변화하고 있다. 기업부실을 두려워하면서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가계금융분야로 몰리고 있다. 여수신업무보다 수익성이 높은 카드사업이나 자산운용쪽을 강화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수익성 확보는 생존의 문제예금규모에 따른 차별화도 노골적이다. 소액예금자들에게는 수수료까지 물리면서 밀어낸다. 제일은행은 예금금액이 적으면 ‘계좌유지수수료’를 부과한다. 예금액이 적으면 이자를 전혀 주지 않는 제도도 한빛 서울은행 등이 도입했다. 대신 이른바 ‘HNW(High Net Wealth)’로 불리는 고소득의 거액예금자유치에 혈안이 돼 있다. 일찍부터 PB(프라이빗뱅킹)를 해온 하나은행 뿐 아니라 대표적 서민은행이었던 국민 주택 신한 제일은행 등 대부분의 은행들이 별도의 서비스와 더 높은 이자로 이들을 유인하고 있다. ‘돈이 안되는’ 80%를 희생하더라도 은행에 ‘돈이 되는’ 20%를 대우한다.대기업 금융에 치중하던 시절 별로 환영하지 않던 중소기업, 그 가운데 우량중소기업을 찾아 다니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수익성확보에 혈안이 된 것은 경쟁력을 넘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국내 은행의 수익성은 아직도 세계적 은행의 평균에 못미친다. 국내 최고의 우량은행인 국민은행의 총자산순이익률(ROA)은 1.0(2000년말 기준)이다. 국내에서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는 시티그룹(2.22)이나 HSBC(1.40) 등 세계적 은행 평균치(1.39%)보다 크게 낮다. 또 다른 우량은행인 주택은행이나 신한은행의 ROA도 1이 안된다. 이익은 커녕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는 은행은 말할 것도 없다.국내은행의 구조적인 저수익성은 오버뱅크(Overbank)가 주요인으로 지적된다. 시장규모에 비해 은행이 너무 많아 금리경쟁 등 과당경쟁과 비효율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수익성을 구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방법은 결국 합병을 통한 대형화로 귀착이 된다.세계 1위인 도이체방크는 99년말기준 총자산 규모가 8천4백38억달러이다. 세계수준의 은행들의 평균 자산 규모도 5천2백87억달러이다. 국내 1, 2위인 국민, 주택은행을 합쳐 봐야 총자산 규모 세계 51위권이다. 메이저플레이어들이 맘 먹고 달려들면 국내시장조차 지키기 버겁다. 바짝 마르고 왜소한 플라이급 권투선수가 근육으로 뭉쳐진 헤비급 선수와 시합하는 링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금융경쟁력을 위한 막대한 IT(정보기술)투자도 대형화의 동인이 되고 있다. “IT분야의 막대한 투자 때문에라도 합병은 당위성의 문제”(국민은행 김유환상무)라는 설명이 그래서 나온다. 시티그룹의 2000년도 IT투자금액만 59억달러이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합쳐봐야 2억5천만달러이다.두 우량은행의 합병은 시장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백종일 현대증권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는 “영업력 향상과 자산풀링을 통한 위험배분의 보험 효과, 서로 최대의 잠재경쟁자를 배제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설명한다.대형화의 또 다른 축은 지주회사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의 지주회사 아래 증권 보험 종금 등 서로 기능이 다른 금융 자회사들을 연결, 분업 효과와 겸업화의 전초기지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모델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한빛은행을 축으로 한 ‘우리’지주회사와 신한은행 등 독자적인 길을 선택한 은행들이 이 길을 걷고 있다.미국의 대다수 금융기관과 일본의 흥업은행, 다이이치강교은행, 후지은행 등이 묶인 미즈호지주회사가 지주회사형태이기는 하다.행 개혁, 성공으로 끝날 것인가문제는 4월에 출범하는 ‘우리’지주회사는 기능이 다른 자회사들이 묶인 것이 아니고 4개의 부실은행들에 하나의 부실종금사를 엮은 조합이다. 보험 증권 등이 빠져 분업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고 겸업화 기반도 안돼 있다.게다가 이들 은행은 기업구조조정과 운명이 교차돼 있다. 현재 경기침체를 이유로 기업부문의 구조조정은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시장원리에 따라 부실기업 퇴출이 시작된다면 부실여신이 많은 이들 은행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국경제의 한 단계 도약에 필수적인 기업구조조정의 완결과 배드뱅크의 집합체인 ‘우리’금융지주회사의 운명은 엇갈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규모의 대형화가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만도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발간하는 금융전문지 ‘더 뱅커’ 12월호는 “금융회사간의 합병에는 난관이 많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전하고 있다. 세계 20위권인 체이스와 JP모건의 합병은 권력 다툼이 우려되며, CSFB의 DLJ합병과정에서는 DLJ의 많은 인재들이 떠나는 손실이 발생했다.“구조조정에 따른 실업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구미에서도 금융기관 사이에 흡수합병이 아닌 대등합병은 쉽지 않다”고 유용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적한다. 하물며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문화에서 노조와 경영층 주주 모두가 만족하는 합병을 이뤄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현재 진행중인 은행의 개혁은 성공으로 끝날 것인가. 기업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있기는 하지만 이제 이익을 못내는 은행은 더이상 국가경제에 짐이 되지 말고 사라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