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면이 담긴 논문을 발표하는 것은 불법 행위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복사기를 이용해 불법으로 복제해 저작권자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요즘 미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문제를 놓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DeCSS라는 암호해독 프로그램을 둘러싼 공방이다.DeCSS는 복제방지 암호를 해독해 DVD에 담긴 영화를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DVD에는 암호화 프로그램인 CSS(Content Scramble System)를 이용해 저장된 영화파일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할 수 없도록 돼 있다.DeCSS는 노르웨이의 요한 센이란 학생이 만들어 공개한 것을 미국 해커잡지 ‘2600’의 편집인 에릭 콜리가 2600 웹사이트에 공개하면서 문제가 됐다.미국영상협회 사이트DVD불법복제를 우려한 미국 영상협회(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 MPAA)는 지난해 8월 DeCSS를 인터넷에 공개한 에릭 콜리를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미국 법원은 98년 발효된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Digital Millennium Copyright Act: DMCA)을 적용, DeCSS를 2600 웹사이트에서 제거함은 물론 관련 링크까지 삭제하도록 했다. 이 법은 불법적인 복제행위나 유통행위 뿐 아니라 보안장치를 해제할 수 있는 기구도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판결로 2600과 같은 웹진뿐 아니라 컴퓨터 보안을 연구하는 대학 교수들의 DeCSS관련 웹페이지가 모두 폐쇄됐다.그러나 DeCSS사건은 1심 판결로 결론이 날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저작권의 보호와 표현의 자유를 놓고 영화업계와 시민단체, 언론인, 법학자, 컴퓨터 전문가들이 팽팽히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이 사건은 미 연방고등법원으로 넘어온 상태다. 이번에는 스탠퍼드 법학대학원의 캐슬린 설리번 총장이 2600측의 변호를 맡는 등 시민단체, 언론인, 법학자, 컴퓨터 전문가들이 1심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이 저작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해 학문연구나 언론보도 등 ‘정당한 사용(Fair Use)’마저 불법행위로 만들고 있다는 위기 의식 때문이다.설리번 총장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은 위헌적이고 DeCSS 배포금지 판정은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지털밀레니엄저작권법의 가장 큰 문제는 저작권을 지나치게 강조해 학문연구나 언론보도와 같은 정당한 사용까지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이다.실제로 이런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권리를 과도하게 이용해 표현의 자유와 학문활동을 제약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에드워드 훨튼 교수팀은 디지털음악 보안시스템의 취약점을 분석해 이를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음반업계의 저작권 침해행위라는 경고장을 받고 발표계획을 취소했다. 펠튼교수 사건은 재산권의 과도한 행사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전형적인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저작물에 대한 정당한 사용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등록 및 게시물 표현의 자유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하지만 검찰측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이런 종류의 소프트웨어의 배포를 막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했다.결국 논란의 핵심은 저작물의 복제를 풀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대단한 ‘무기’가 될 것인지 VCR나 복사기와 같은 ‘복제기구’의 성격을 지닌 것인가에 달려 있다.이와 관련, 포레스터 리서치의 분석가인 에릭 슈라이더는 흥미로운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영화업계가 이번 소송에서 패배하더라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영화 배급구조에서 인터넷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