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렉스 익스플로러1 있습니까? 재고 없으면 물건 들어 올 때 연락주세요”일본에서도 최고급 상품이 많기로 소문난 미쓰코시 백화점의 니혼바시 본점 6층 특설매장. 어느 토요일 오후 흰 반바지 차림의 30대 남성이 시계 코너에서 주문을 해놓고 발길을 돌리고 있다. 남성의 옷차림은 남방셔츠 상의에 가볍게 집 부근을 나들이할 때 신는 샌들을 신고 있다.남성 고객이 부탁한 시계의 판매가는 개당 무려 38만엔(약 4백만원). 초고가품이 득실대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매장 사정에 비춰 본다면 그리 비싼 가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시계 코너에서는 똑같은 시계 주문을 무려 30개 이상이나 받아 놓고 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고객의 대다수는 30대 남성들. 우아한 옷차림의 부유층 중년 부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고급품 매장에 평범한 젊은 남성 고객이 몰려 들고 있는 것이다.미쓰코시 백화점의 본점 6층은 격조와 분위기에서 일본 최고로 꼽혀온 쇼핑 명소다. 초고가 상품과 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매장이 고객들을 주눅들게 하기 충분해 서민들은 잘 드나들지도 않는 곳이었다.그러나 약 1년 전부터는 이곳에도 변화의 물결이 닥치기 시작했다.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매장을 찾아 오는 젊은 고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유모차를 끌고 부부동반으로 나오거나 여성끼리 짝을 지어 찾아오는 고객들도 부쩍 눈에 띄었다. 새로 등장한 고객들의 연령은 20대 후반에서 30대까지가 대부분. 그렇다고 이들이 단지 눈요기만 하러 나온 것은 아니었다. 실제 주머니를 열고 자신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성큼 집으면서 단숨에 귀한 손님으로 자리잡아 백화점측을 놀라게 했다.최고급 상품 구매 … 백화점까지 성업‘얼어붙은 소비를 녹이는 30대의 훈풍’.지독한 소비불황으로 경제의 실핏줄이 곳곳에서 엉켜 있는 일본에서는 30대의 구매력이 시장을 살리는 새로운 활력소로 등장했다며 30대의 구매행동을 주시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30대가 선호하는 상품, 좋아하는 서비스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바잉 파워와 기호의 비밀을 캐는 기사가 매스컴에도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30대가 소비 불황을 타개할 구세주로 각광받고 있는 증거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닛쇼이와이 자동차판매가 운영하는 도쿄의 프랑스 ‘푸조‘ 자동차 쇼룸은 주말만 되면 젊은 부부들로 대성황을 이룬다. 젊은 고객들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개성적인 디자인의 소형차 ‘206’시리즈. 동급의 일본차보다 수십만엔이 더 비싸지만 젊은 고객들은 아랑곳 않는다. 매장 관계자는 “구매고객의 7할은 35세 이하”라며 “올 봄에 발매한 2백75만엔짜리 오픈카는 지금 예약해도 내년 봄에라야 인도해 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웨스틴 도쿄 등 초일류 호텔이 판매하는 1박2일 패키지 상품도 대인기다. 1박에 수만엔에서 10만엔이 넘는 것이 수두룩한데도 고객이 크게 늘어나면서 지난해 여름보다 매출이 배 이상 늘었다. 호텔측은 “30대의 평범한 여회사원끼리 짝을 지어 가장 많이 찾아 오는 것 같다”며 “고급스런 분위기를 즐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도쿄 하라주쿠에 개점한 디자인가구 전문점 ‘hh스타일.컴’에서는 구미의 유명 브랜드 의자가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다. 하나에 보통 10만엔 이상씩 하지만 구매고객의 대다수는 30대 이하다. 고객들중에는 값싸고 비좁은 아파트에 살지라도 의자 하나만은 고가품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는게 가구점측의 귀띔이다.미쓰코시의 카르티에 귀금속매장에서는 1백만엔이 넘는 손목시계가 7월에만 10개 이상 팔렸다. 티파니코너에서는 39만엔짜리 다이어 귀고리를 여사원이 퇴근길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 가지고 가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모두가 30대의 큰손 고객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현상이다. 소비 불황의 최대 피해자로 꼽혔던 도쿄의 백화점들은 올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 동기보다 0.7% 늘어나는 이변을 경험했다. 백화점가에서는 매출증가의 원동력이 상당수 30대 고객에서 나왔으며 이들의 구매력 만을 놓고 본다면 불황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미쓰코시백화점의 후나쓰 요시오 특선잡화부장)30대가 일본 소비 시장의 새로운 중핵으로 떠오르게 된 배경을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찾고 있다.우선 지금까지의 소비 트렌드를 주도해 온 전후세대(50대) 및 이들의 2세(20대) 사이에 끼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계층이 나름의 역할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태평양전쟁에 패한 직후 태어난 50대들은 빈곤과 궁핍에 길들여진 후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공업화 시대를 거쳐 왔다. 자연 개성보다는 실용과 실리, 즉 경제성을 중시하는 습관이 몸에 배 있다. 풍요와 자유 속에서 자란 20대는 강한 개성과 다양한 욕구를 기본적 특성으로 갖추고 있다. 하지만 90년대의 10년간을 장기 불황의 수렁 속에서 헤맨 일본은 이들에게 취업난과 가장의 실직 아픔을 안겨 줬고 이같은 환경 속에서 20대의 호주머니는 얇을대로 얇아져 있다. 쓰려고 해도 쓸 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토추 패션사업부의 한 관계자는 “20대의 소비 특징은 가격을 철저히 따지는 것”이라며 “수입명품 같은 고가품을 광적으로 선호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저가상품에만 몰리는 것이 이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0대 부모들 경제력도 소비행태에 영향이에 반해 일본이 고도성장의 날개를 단 60년대에 태어난 30대는 양쪽의 장점을 고루 갖고 있다. 강한 개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소비욕구를 발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50대에 못지 않은 파워를 갖추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덴쓰종합연구소의 야마사키 세이코 수석연구원은 “30대는 직장에서 구조조정의 쓰라림을 아직 겪지 않았다며 따라서 가처분소득이 높을 수 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는 “부양가족과 형제도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몸이 가벼운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은 30대의 부모들이 가진 경제력이다. 일본교통공사에 따르면 해외 여행상품을 판매할 때 여행사들이 가장 기대를 거는 것은 고령자들과 3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30대의 부모들(60대)은 아직 건강한데다 저축과 연금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가족 동반으로 해외 나들이 하기에 딱 좋은 대상이라고 일본교통공사의 고바야시 히데토시 마케팅부장은 털어놓고 있다.유통업계에서는 30대의 구매력을 정보기술(IT)열풍과 관련지어 분석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최근 2~3년간 정보기술시장의 거품으로 자산소득이 급격히 팽창한 벼락부자가 많아지면서 이들의 씀씀이가 소비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유통 전문가들은 또 장기불황을 거치면서 ‘1억 인구가 모두 중산층’이라는 환상은 깨져 버렸다며 소비계층의 이분화로 30대 신흥 부자의 구매력이 새로운 주목대상이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소비시장의 구세주로 떠오른 30대 일본인의 파워가 어느 정도까지 지속되고 얼마나 큰 변화를 낳게 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30대의 부모인 60대 고령자들의 수입이 계속 줄어들면 결국 30대도 미래 소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며 비관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경제 저널리스트 오기하라 히로코씨)하지만 야마사키 수석연구원은 “30대 세대는 평생 저축을 늘린다든지 하는 일에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연령층”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는 부모의 간병과 같은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30대는 자신의 힘으로 고생해서 하기 보다 전문 서비스 인력을 불러 간단히 해결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함께 “실업의 시련에 봉착할지라도 곧 새로운 자격을 취득해 다른 미래를 열어 나가는 도전의식으로 무장한 것이 30대”라며 “이들의 개성과 경제적 파워는 앞으로도 소비불황의 탈출구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진단했다.